※신문기사※

두번 쫄딱 망했던 이 남자 "뻥튀기로 인생 뻥 뚫었죠"

형광등이 2017. 1. 3. 11:33

두번 쫄딱 망했던 이 남자 "뻥튀기로 인생 뻥 뚫었죠"



[IMF 20년, 해는 다시 뜬다] [1] 뻥튀기 장사로 일어선 김용석씨

17년 뻥튀기로 세 딸 대학 보냈으니… 내 인생이 '뻥'은 아니죠

"친구사업에 1억 대줬다 날리고 잘나가던 순대집도 망해…

장돌뱅이 하다가 뻥튀기 가게, 한번 망했지만 두번째는 술술

지하 단칸방에서 탈출하고 10평이던 가게도 60평으로

남들처럼 떵떵거리진 못해도 돈 버는 대로 '뻥뻥'거리며 살죠"

"두 번 쫄딱 망하고도 이 정도 재기(再起)한 걸 보면 오르락내리락했던 제 인생이 커다란 '뻥' 같아요."

서울 중랑구 묵동에서 '뻥튀기' 가게를 운영하는 김용석(62)씨가 깊게 주름이 파인 두꺼운 손으로 뻥튀기를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17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뻥이오"라고 목청껏 외친 덕분인지 웃음소리가 우렁찼다. 김씨는 "어릴 때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화전민으로 살아서 사람 구경을 못해 숫기가 없었는데 뻥튀기 장사 하면서 배짱만 늘었다"고 말했다. 옆에서 뻥튀기를 봉지에 담던 아내 조순남(58)씨가 "총각 땐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 이젠 손님한테 '예쁘니까 서비스 더 드린다'는 '뻥'을 술술 늘어놓는다"고 거들었다. 뻥튀기 가득한 가게에 웃음소리가 넘쳤다.

경기 가평 출신인 김씨는 중졸이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평생 개미처럼 열심히 살아왔다. 17세 때 연탄공장에 취직해 16년간 일했다. 단칸 사글셋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해 딸 셋을 낳았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38세 때인 1994년 처음으로 서울에 20평대 아파트도 장만했다. 1996년에는 순대 가게를 차렸다. 하루 80만원어치를 팔 만큼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집과 가게를 담보로 대출받은 돈 1억원으로 친구 사업에 투자한 것이 화근이었다. 1997년 IMF 사태로 친구가 망했다. 믿었던 친구는 잠적했다. 결국 김씨 가족은 집과 가게를 처분하고 서울의 지하 단칸방으로 옮겨야 했다. 큰딸이 대학교 1학년, 둘째와 셋째는 각각 고2, 중3 때였다.

 

서울 중랑구 묵동에서 뻥튀기 가게를 운영하는 김용석씨가 지난달 말 매장에서 아이 키 높이만 한 뻥튀기를 끌어안고 웃고 있다. 그는 20년 전 IMF 사태로 사업에 실패한 이후 전국을 돌며 ‘장돌뱅이’로 살다 뻥튀기 재료와 기계까지 파는 도매상 영업으로 재기했다. /이태경 기자

어렵게 일군 모든 것을 날려버린 첫 번째 추락. 그러나 김씨는 좌절할 수 없었다. "가장(家長)만 바라보는 아내와 세 딸 앞에서 넋 놓고 시름에 잠겨 있을 틈이 없었죠." 처제에게 80만원을 빌려 10년 된 중고 트럭을 샀다. 전국을 돌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 인생'이 7년간 이어졌다. 첫 3년간 계절과 장소에 맞춰 호떡·엿·도넛·산낙지 등을 팔았다. 한번 집을 나가면 서너 달 동안 트럭에서 먹고 잤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일했다. 돈 10만원이 모이면 꼬박꼬박 집에 부쳤다. 장사하다 탈진해 쓰러진 적도 있었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다. 돈보다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2000년부터 뻥튀기 한 품목에만 집중했다. 너무 힘들어 가평 아버지 산소에서 3일간 소주를 마시다 내려오던 날, "뻥튀기도 괜찮겠더라"는 모자 장수의 한마디가 이상하게 가슴에 꽂혔다고 한다. "전국을 돌며 이것저것 팔 때 '뻥이오' 소리와 고소한 냄새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부러웠어요. 크게 '뻥이오' 소리치면 스트레스라도 풀릴 것 같았죠." 장돌뱅이 경험이 뻥튀기 장사에 큰 보탬이 됐다. 서울 목동 8단지 상가, 의정부 한주아파트, 구리 백병원 등 장사하면서 눈여겨본 '목 좋은 곳'을 요일별로 돌며 뻥튀기를 팔았다. 기를 쓰고 '뻥이오' 외치다 손님들에게 "아저씨 목소리가 기계소리보다 더 크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루에 30개들이 2000원 뻥튀기를 100봉지씩 팔았다. 매일 10만원씩 집에 부칠 수 있을 정도로 벌이가 좋아졌다. 김씨는 "돈 버는 맛에 뻥튀기 장사 4년 하면서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말했다. 뻥튀기 판 돈으로 2004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들여 뻥튀기 기계와 재료를 파는 가게를 차렸다. IMF 7년 만에 다시 가게를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재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뻥튀기 기계는 기대만큼 팔리지 않았다. 기계와 재료 파는 데 정신을 쏟다가 정작 뻥튀기 과자를 제대로 못 팔았다. 잘나갈 때 매일 20만원어치씩 나오던 하루 매상이 7만원까지 떨어졌다. 월세를 내기는커녕, 1년 만에 보증금까지 까먹고 트럭 뻥튀기 장사로 돌아왔다.

김씨는 "그때가 가장 절망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2005년 어느 겨울 밤 장사를 마치고 녹초가 된 몸으로 지하 단칸방에 돌아오니 가족들이 모두 자는데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기름값 아껴야지'란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보일러 온도를 낮췄는데 그만 보일러가 꺼져버렸다. 다시 켜려고 해도 켜지지 않았다. 너무 낡아 고장이 난 것이다. "그 순간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김씨는 근처 산에 올라가 하늘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정직하게 살면 하늘이 돕는다는데 다 거짓말"이라고 악을 쓰며 한참 울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중랑구 묵동의 뻥튀기 가게에서 환하게 웃는 김용석씨. 그는 “뻥튀기 장사로 한 푼 두 푼 모아 딸 셋을 대학에 보낸 것이 큰 자랑”이라고 말했다. 김씨 부부가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첫째 딸이 두 여동생의 밥을 차려주는 등 집안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이태경 기자

울다 지칠 무렵, 집에서 자고 있는 아내와 세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온 그는 친구에게 1억원을 빌려준 차용증과 일기장 등을 모조리 태웠다. "옛날은 잊고 오직 앞날만 생각하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닥치지도 않은 미래를 지레 걱정하는 대신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담배도 끊었다. 다시 1년간 독하게 장사해 모은 돈과 친척에게 빌린 돈 2500만원으로 2006년 다시 뻥튀기 가게를 차렸다. 아내도 가게 일을 도왔다. 엄마 대신 대학을 졸업한 큰딸이 동생들 밥부터 빨래까지 온갖 집안일을 맡았다. 김씨는 "그때까진 내가 가족을 지켜준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가족이 날 지켜줬다"고 말했다.

가족이 뭉쳐 10평 남짓한 가게를 10년 만에 60평으로 키웠다. 2010년 방 4개짜리 빌라를 장만했다. 김씨는 "너무 오래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낮에 집 안에 불을 안 켜도 되는 게 신기하고 정말 좋았다"고 했다. 뻥튀기 장사로 세 딸 모두 대학 보낸 것이 큰 자랑이다. 큰딸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버지 가게를 돕고 있고, 둘째는 강남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셋째는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의 남은 목표는 딸들 얼른 시집보내고 부부끼리 알콩달콩하게 사는 것이다.

17년 동안 뻥튀기 기계를 돌리면서 얻은 상처투성이 손으로 기계를 두드리며 김씨가 말했다. "밑바닥서 다시 올라오는 건 안개 낀 거리를 걷는 것 같아요. 앞이 안 보이죠. 그래도 한발 내디디면 그만큼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는 만큼 가다 보면 목적지에 갈 수 있어요. 그날그날 나만의 목표를 달성하는 재미로 살았더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죠. 저는 '떵떵'거리지는 못해도 한 푼 두 푼 벌리는 대로 '뻥뻥'거리면서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