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오락♣

棋聖 오청원 타계

형광등이 2014. 12. 1. 12:45
타이젬 시사저널
실록 '100세 棋聖' 오청원
100세 맞은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의 일대기 요약
2014-06-17 오전 11:24:22 입력 / 2014-06-18 오전 12:03:54 수정

▲ '살아있는 기성' 100세 오청원.(사진출처=한국
기원. 일본기원. 다음 블로그 野人. 중국 혁성)

오청원(吳淸原)은 살아있는 기성(棋聖)이다. 중국 발음으로는 우칭위안이지만,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어 한자의 우리식 발음 그대로 오청원이라 부르겠다. 1914년생이니까 올해 딱 100세 상수(上壽)에 이른 오청원은 지금도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 있다. 고인이 된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 선생보다는 9년, 일본의 사카다에이오(坂田榮男)보다 6년 연상. 6월16일이 그의 100번째 음력생일이다.

오청원은 지난 2012년 부인과 사별 후 외출은 자제하고 있으며 외동딸 고가스미(吳佳澄)와 도우미의 보살핌으로 일본의 한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올 2월 일본기성전에 그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전 세계 바둑인들에게 그의 정정함을 알렸다. 제자로는 린하이펑(林海峰) 루이나이웨이(芮乃偉)가 있다. 루이는 오청원의 나이 80세에 받아들인 제자.

오청원은 항상 희대의 영웅들과 저울질이 되는 출중한 기재였고 시대를 통합해도 가장 위대한 기사로 꼽힌다. 아무리 양보해도 21세기 바둑사에서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의 위치를 갖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빅게임이 있으면 어디든 날아가서 젊은 기사들과 어울려 검토에 열중하곤 했던 정열가였다.

오청원의 승부사로서의 업적은 무엇보다 치수고치기 10번기 시리즈일 것이다. 지금처럼 상금을 건 타이틀전이 드물고, 단(段)의 권위가 존중되던 시절. 그럼에도 오청원은 그의 인생 하이라이트였던 십 수 년을 승부바둑의 극단 치수고치기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니 승부사도 이런 승부사는 일찍이 없었다. 오청원은 1939년부터 1955년에 걸친 무려 17년간의 10번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모든 도전자를 하수급으로 전락시킨 기막힌 승부사였다.
당시 신포석법은 흑1,3,5로 삼삼
화점 천원을 착수하는 것이었다.

또 그의 바둑사적 업적에서 결코 빠지면 안 되는 것은 '신포석'이다. 1930년대 기다니미노루(木谷實)와 함께 현대바둑의 효시가 될 업적 신포석을 개발하였다. 신포석이란 흑을 들고서 화점 삼삼 천원을 삼각편대로 형성하는 독특한 포진을 말한다. 특히 천원(天元)은 당시 바둑가에선 착수를 금기시하는 신성불가침이었다. 바로 그 옥쇄를 풀어헤친 이가 오청원이다. 지금 신포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사고의 출발점부터 속도와 중앙을 중시하는 현대바둑의 혁신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난 오청원은 이름이 천(泉), 자(字)는 청원(淸原)이었다.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친은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베이징의 최고재판소를 다녔던 엘리트였다. 오청원의 부친은 일본 유학시절 방원사(方円社 일본기원의 전신)에서 일본의 뭇 프로들과 어울릴 만큼 열성 바둑 팬이었는데, 그의 열정이 오청원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

오청원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부친은 공교롭게 오청원이 12살 때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유복했던 집안이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울었고, 급기야 오청원은 바둑으로써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소년가장 신세가 된다. 결국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 것도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부친의 죽음 때문이었다.

생전에 부친은 엄한 교육을 자식들에게 시켰다. 아예 공교육은 시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 부친의 바지바람은 바둑으로도 옮겨 붙는다. 삼형제에게 모두 바둑을 가르쳤으나, 제일 어렸던 오청원이 기재를 보이자 그에게만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게 된다.

20년 전 필자도 취재과정에서 확인한 것인데, 오청원은 두 손 중지가 조금씩 휘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오청원은 부친이 물 건너가져다 준 바둑기보집이 너무 무거워, 책을 받쳐 든 중지가 휘어지게 되었다고. 타고난 기재도 불세출의 영웅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 2012년 본인방 도전기에 오청원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왼쪽부터 장쉬 린하이펑 왕리청 이치리키료 다카오신지.

1920년대 중국은 권력자가 내놓은 약간의 돈으로 강호의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오청원이 바둑이 세다는 소문은 자자했던 터라 지역유지가 그를 받아들인다. 지금으로 치면 권력자의 녹을 받는 장학생이 된 것.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오청원을 돌봐주던 유지가 사망하자, 자연스레 홀로 '대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받은 상금 상품을 오청원이 독식하게 되자 신문에 오청원의 이름도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신동을 보기 위해 별도의 대회를 만들기까지 했다니 가히 오청원은 '프로 아닌 프로'로서 소문이 대단했다.

일본으로부터 이와모토 6단, 고수기 4단 일행이 방중하게 된다. 이와모토는 1940년대 중반 하시모토우타로(橋本宇太朗)와 함께 일본 바둑계의 거성이 되는 인물로 혁혁한 토너먼트 프로. 그때 처음으로 바둑 선진국인 일본 프로와 대국할 기회가 생겼는데, 이와모토에게 오청원은 석 점을 놓고 2연승, 두 점을 놓고 2집 패를 당한다. 그리고 고수기에겐 두 점으로 이긴다.

'북경의 천재소년'은 12세 여름에 일본프로와 자연스레 두 점 치수로 공인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초단과 5단 사이에서는 공식 승단시합에서는 두 점 이상을 놓던 시절이었다.

그 후 일본에서도 북경의 천재소년을 데려오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오청원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는 2년이 더 소요되며 스승이 되는 세고에겐사쿠(瀨越憲作)와는 무려 50여 통의 서한을 주고받았다. 세고에의 오청원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오청원과 조훈현은 같은 스승의 문파에 속한 사형(師兄). 제자 욕심이 많았던 세고에는 마지막 제자로서 한국의 조훈현을 택한다. 세고에의 제자 중 또 한 명은 훗날 본인방에 오르는 하시모토우타로. 따라서 세고에는 한중일 삼국의 최고수급인 오청원 조훈현 하시모토 세 사람을 제자로 둔 행복한 사나이였다.

1927년. 드디어 13세의 소년 오청원은 베이징 일인자가 된다. 그해 여름 또 다른 일본프로 이노우에 5단에게 두 점 바둑에서 승리, 정선으로 세 판을 두어 1승1무1패를 기록한다. 일본에서는 4단 이상은 고단자로 불렀고, 고단자와 정선으로 두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이노우에와 정선이었다는 것은 오청원의 실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된다.

▲ 193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 오청원은 오른쪽에 안경을 꼈다.

1928년 오청원의 스승이 될 세고에의 뜻을 받들어 하시모토가 또 찾아온다. 하시모토는 이노우에와 함께 후지사와 사카다 같은 걸물이 나오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를 호령하던 거물. 그 하시모토에게 오청원은 정선으로 덤벼 4집승, 6집승을 거두는 초괴력을 과시한다. 불과 14세의 소년의 기력이 일본의 신예 최강그룹과 맞먹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제 도일(渡日) 시점이 코앞에 다가왔다.

오청원이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28년 10월이었다. 일종의 용병으로 2년 계약이었다. 그러나 2년 후에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기회의 땅 일본을 등지고 다시 중국의 '저잣거리'를 헤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바둑의 메이저리그였다.

과연 이 소년에게 몇 단(段)을 윤허할 것인가. 몇 단(段)을 주느냐는 오청원의 자존심이기 이전에 일본기사의 자존심도 걸려있던 중차대한 문제였다. 당시 단은 절대의 권위였다. 지금처럼 프로시합이 없었고 오직 승단대회가 최고 권위의 승부시합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절. 같은 프로라도 치수가 단위에 따라 달랐다.

여전히 토박이 정신에 투철한 기사들은 굴러온 돌 오청원이 기껏해야 초단밖에 더 되겠냐고 비아냥거렸다. 그의 스승 세고에만은 오청원이 3단 실력은 충분하다고 주장하여 3단격(格)으로 간주하고 정식 단위 인정시험을 치르게 된다.

첫 상대는 그 해 정기 승단시합에서 1위를 차지한 시노하라 4단. 오청원은 흑을 들고 불계승을 거둔다. 2국은 수재 명인(슈사이 名人)과의 2점 바둑이었다. 수재 명인은 지금으로 치면 굵직한 타이틀을 전부 보유한, '9단 이상의 단'처럼 권위로도 최고의 존재. 본인방 수재는 35Kg에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오청원은 여기서도 당당히 4집승을 거두었다. 명인에게 2점 바둑을 이긴 후 다시 무라지마 4단에게는 흑5집승. 비로소 오청원은 정식 3단을 인정받게 된다.

▲ 본인방 수재와 시험기를 치르는 오청원(왼쪽).

3단을 인정받고 난 다음 오청원이 일본 바둑계로 곧장 뛰어든 건 아니다. 그는 평소에도 몸이 약해 장시간 두는 바둑은 힘들어 했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건강진단을 받게 된다. 진단 결과는 실망이었다. "가슴에 결핵의 자연 치유 흔적이 있어 재발될 우려가 있다. 선천적으로 몸도 허약하다. 따라서 기사의 목숨을 건 승단시합에는 불참을 권유 한다."

단위의 높고 낮음으로 그 신분의 높낮이도 결정된다고 할 만큼 중시되던 승단시합. 일본에서는 승단시합을 대수합(大手合)이라 부른다.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첫해엔 오청원은 잡지나 신문바둑을 두었다. 지금으로 치면 이벤트 바둑이라고 보면 된다. 잡지사에서 주최하여 그 기보를 연재하기로 약속한 그런 임시 대회였다.

오청원의 재주와 끼는 곧장 빛을 발한다. 시사신보에서 주최한 승발전(지금의 연승전)에서 일곱 번째 선수로 참가한 오청원은 기다니미노루와 대국하게 된다. 기다니는 한국의 조남철 김인을 비롯하여 오다케 다케미야 고바야시 그리고 조치훈까지, 일본바둑의 영웅들 모두를 길러낸 대모(代母)이며, 훗날 오청원과 함께 신포석 폭풍을 몰고 온다.

이 기다니와의 만남은 수월치 않았다. 당장은 오청원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흉내바둑이다. 오청원은 흑을 들고 첫수를 천원에 갖다 놓는다. 그 다음은 바둑판이 천원을 중심으로 점대칭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상대가 두는 대로 저쪽 반대편에서 그대로 따라두는 것이다.

당시 흉내바둑은 오청원의 탐구심과 승부기질 등 양 측면이 있었다. '이렇게 흉내바둑을 두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라는 식의 궁금증을 직접 확인하고자 함이었고, 또 하나는 기다니라는 거장에게 이길 도리가 없으니 이런 '변칙'으로 판을 좁혀간 다음 싸우겠다는 승부사다운 면모일 수도 있다. 기다니와의 흉내바둑은 62수까지 이어졌고 그 이후 기다니의 완착을 등에 업고 앞서갔지만, 오청원 역시 실수를 범해 결국은 3집을 지게 된다.

▲ 기다니도장 수업장면. 이 사진 속에 조치훈도 있다.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대국이 끝났을 때는 전차도 끊어진 심야였기에 기다니와 오청원은 기원에서 밤을 새며 바둑이야기로 동트는 새벽을 맞이한다. 그때 5년 연상인 기다니와 오청원은 맘을 터놓는 사이로 발전한다. 어쨌든 오청원이 일본에 건너온 지 2년이 넘도록 기다니에게는 흑을 들고도 좀체 이기질 못했다.

1930년 오청원은 건강이 회복되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춘계 승단시합에 참가한다. 당시 3단의 신분이었으나 춘계승단대회에서 7승1패를 기록하고, 추계대회에서는 7전전승을 기록하여 1위로 4단 승단. 1931년 승단대회에서는 춘계 6승2패, 추계 8전 전승. 다시 1932년에는 춘계 8전 전승, 추계 7승1패로 당당히 5단까지 다다른다. 1932년 시사신보에서 주최한 연승전에서 무려 18연속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1928~1932년에 오청원은 무려 9할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창호가 가장 활발히 성적을 올릴 때도 1년 성적도 9할이 된 적은 없다. 그러나 오청원은 무려 6년간의 통산 성적이 9할이었으니 그 기재를 말해 무엇할까.

오청원은 훗날 회고록에서 1928~1932년을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해였다고 썼다. 어찌 타고난 재능이라고 해서 수 삼 년의 노력으로 영광의 궤적을 그릴 수 있으랴. 아마도 그 회고는 열심히 공부한 다음해인 1933년 운명처럼 '신포석'을 창안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참고로 오청원은 흑으로 공부할 땐 혼인보 수책(슈사이 秀策), 백을 들었을 때 공부는 수영(슈에이 秀榮)의 바둑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 즈음엔 아무래도 흑 차례일 때가 많았으므로 견실한 수책류를 들고 나와서 흑번무적(黑番無敵)의 시대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덤이 많으니 그러한 1.3.5의 수책류는 서서히 사라졌다.

오청원을 말하면서 빠질 수 없는 '신포석'은 1933년 싹을 보인다. 기다니와의 10번기(치수고치기 10번기 아님. 당시엔 10번기 6번기가 흔했다.)에서 오청원은 흑 차례일 때 4연성 포석을 선보인 바 있고, 기다니도 뚜렷하게 귀보다는 중앙의 세력을 중시하는 타법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달라지고 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젊은 두 기사는 이러한 혁신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 100회 생일을 맞아 일본에서 두 제자 린하이펑과 루이나이웨이를 사이에 두고 기념촬영한 오청원.

오청원은 거침없었다. 일본 바둑계 최고수였던 수재 명인의 환갑기념 대국에서도 자신이 창안한 신포석을 거침없이 구사했다. 오청원의 정선으로 시작된 대국에서 흑의 첫 수가 우상귀 삼삼, 계속해서 좌하귀 화점, 그리고 세번째 착점이 천원으로 마치 바둑판을 대각선 방향으로 길게 연결하는 듯한 포석. 당시 신포석을 정리했던 바둑평론가 안영일(야스나가하지메)는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 호쾌했다'고 적었다.

이 기보가 신문에 보도되자 전 일본은 뒤집어졌다. 분명한 것은 당시 바둑 열기는 요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특히 케케묵은 형식에 얽매였던 바둑을 자유롭게 둘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오청원의 신포석은 뭇 아마추어들의 해방구였다. 오청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대중 잡지에서 실시한 예능인에 대한 인기투표에서 문인 미술가 등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수재와의 대국은 1933년 10월16일에 시작되어 다음해 1월29일에 끝났다. 장장 3개월이 넘게 대국이 진행된 것인데, 물론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바둑을 둔 것은 아니고 제한시간을 각자 24시간으로 하되 하루에 얼마 동안 바둑을 진행하다가 백 차례의 명인이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대국을 중지하고 며칠 후에 다시 속개하곤 했다.

게다가 요즘처럼 두 대국자가 대국 장소에서 합숙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적당한 날을 받아서 대국을 계속하기 때문에 백 차례에서 중단한 수재로서는 좋은 수가 생각날 때까지 며칠이라도 연구할 수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오청원에게 매우 불공평한 진행방식이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원칙이나 상식보다는 강자의 권위와 특권이 우선하기 마련인 것.

수재의 거듭된 대국중지 선언으로 인해 3개월 동안 무려 13차례나 대국 중단과 속개를 거듭했던 이 바둑은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다가 160수에 이르러 수재의 묘수가 등장해서 결국 오청원이 두 집을 졌다.

훗날 수재의 묘수는 휴식기간 중 본인방 문중의 제자들이 스승의 바둑을 놓고 공동 연구를 벌인 끝에 발견한 것이라는 소문이 터졌다. 당시 묘수를 발견한 것으로 지목된 마에다노부아키는 20여년이 지난 후 "그 수를 내가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며 고백했다. 당시 일본은 오청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불공평한 대국 방식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오청원-기다니 치수고치기 10번기 포스터.

치수고치지 10번기. 그것은 칼잡이들의 진검승부로 몹시 가혹했다. 한번 무너지면 가면을 빼앗긴 프로레슬러처럼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는 승부다. 그간 쌓아온 기사의 명예는 큰 상처가 나고 또 다시 치수고치기를 하지 않는 한 일인자 자리는 영원히 사라진다.

본인방 수재가 은퇴하면서 타이틀전이 생김으로써 치수고치기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400년의 본인방 역사를 돌이켜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오청원은 회고록에서 밝혔다. "기사생명을 건 살과 뼈를 깎는 매치였다. 특히 요미우리에서 십번기를 둔 10년은 배수의 진이었다. 10번기는 진검승부의 두려움이 지속된다. 현재 타이틀전은 한 두 번 져도 명예에 상처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몇 번 씩이나 도전할 기회가 있지 않은가."

오청원은 1939년 카마쿠라 10번기를 시작으로 1955년 다가카와가쿠(高川格)까지 당대 최고수를 상대로 10회에 걸쳐 100국 가까이 두게 된다.

1939년 9월. 오청원의 최초의 10번기가 치러진다. 가다니미노루(木谷実) 간의 10번기. 특히 건장사라는 절에서 벌어진 제1국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국이 된다. 오청원은 훗날 "수재 명인에세 신포석으로 대항한 1933년의 한판과 함께 잊을 수 없는 바둑이다"고 회상한다.

1국은 3일간 치러진다. 기다니의 흑 차례. 기다니의 바둑은 중반에 접어들 무렵이면 상대방의 모양 속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따라서 기다니와의 바둑은 쳐들어온 돌을 둘러싸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빈번했다.

기다니와 오청원은 필사적이었다. 급기야 기다니는 코피를 쏟고 만다. 고작 50여수가 진행되었건만 제한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기다니는 몸부림치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줄곧 미세한 바둑이었지만 국면이 호전되니,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빈혈을 일으켰다고. 결국 막판까지 왔다갔다하던 승부는 마지막 실착을 한 기다니의 패배였다. 오청원의 2집승.

▲ 가마쿠라 10번기. 오청원-기다니.

1939년이면 중일전쟁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국수주의가 만연한다. 그런데 1국에서 '실감나는' 관전기가 실리게 되면서 자그마한 문제가 생긴다. 오청원이 매너 없이 기다니가 데굴데굴 구르는데도 모른 척 하면서 계속 두어나간 것으로 오해를 받게 된 것. 따라서 승부에만 관심이 있는 '마귀'라는 비난이 쇄도하였다.

급기야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바둑평론가 안영일은 당시의 분위기를 "오청원이 10번기를 이기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전했다. 스승인 세고에도 10번기 중단 문제로 고심했지만 결국 지속되길 바랬다. "바둑꾼은 비록 반상에서 목숨을 앗겨도 행복한 일이니 당당히 두어가시게!"

1940년 4월. 오청원이 2승1패로 리드한 이후 이 10번기의 성과를 좌우하는 일국인 4국이 벌어졌다. 오청원의 흑 차례. 끝내기에 들어설 무렵 역 끝내기를 두어 거꾸로 1집을 남길 수 있었다. 오청원이 이때 만일 졌다면 2승2패가 되었을 것이며, 그러면 10번기도 이후 100국 가까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회고했다.

5국마저 패해 4승1패가 되자 기다니는 오랫동안 유지했던 장발을 싹둑 자른 채 까까머리로 나타났다. 나름의 결연한 태세였지만 오청원의 상승세를 막지 못한 기다니는 6국마저 패했다. 오청원은 5승1패. 드디어 기다니를 선상선(선상선으로 치수를 바꿔놓고 말았다. 당시는 호선-정선 사이에 선상선(先相先)이라는 치수가 존재했다. 세 판을 두면 '흑 백 흑'을 차례로 잡는 치수.)

치수고치기의 약속은 4승차가 나면 치수를 바꾼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4전전승이나 6승2패가 되면 치수를 바꾼다. 그런데 실제로 치수가 바꿔지자 호선만 두던 기다니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모인 셈. 당시 언론은 '아직 진짜 승부가 아니다'는 반론을 폈다. 이름을 붙이길 '신예 10번기'라고 칭한 것인데, 기다니를 신예로 보고 일본의 뭉개진 자존심을 만회해보려는 속셈이었다.

▲ 작년 기성전에서 이야마유타와 야마시타게이고를 사이에 두고 기념촬영.

1941년 6월, 두 번 째 10번기가 성사된다. 오청원을 상대로는 현재 재야에 있지만 수재 명인 이후 바둑계의 최장로인 기정사(棋正社) 총수 가리가네준이치(雁金準一) 8단. 당시 일본기원에는 8단이 없었으니 원래 치수라면 호선이 될 수 없었지만, 가리가네가 한번 두어보고 싶다고 해서 추진이 된 것이라고. 오청원을 일본기원의 대표, 가리가네을 기정사의 대표 자격으로 10번기를 실현시켰다.

제한시간에서 가리가네가 장시간을 요구하고 오청원은 단시간을 희망했다. 요미우리의 조정 끝에 제한시간은 16시간으로 결정되었다. 1941년 8월. 3일간의 1국은 가리가네의 흑차례였지만 오랫동안 공식시합에서 떨어져 있던 탓인지 가리가네는 불계패했다.

제2국은 10월에 열렸다. 오청원의 백 차례. 이 바둑에서 오청원은 가리가네의 힘을 실컷 맛보았다. 3일째 밤까지 이어진 바둑은 특히 가리가네가 고령이어서 후반으로 갈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결국 오청원의 백6집반승.

3국을 가리가네에게 4집패를 당했지만, 4,5국을 연승하며 4-1로 일방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아직 치수를 바꿀 때까지는 1승이 남았지만, 가리가네의 몸과 마음을 염려해서 6국 이후는 중단했다. 두 번째 10번기도 쾌승이었다. 이미 4승1패만해도 충분히 기울었고, 가리가네가 호선으로 응대해준 것이 오청원으로서는 고맙다고 할 일이다.

▲ 1992년 부산을 방문한 오청원과 그의 아내(왼쪽) 나카하라가즈꼬 여사. 이 사진을 감격스럽게도 기자가 월간'바둑' 기자 시절에 직접 찍었다.

1943년 가을 오청원은 8단으로 승단하였다. 8단진 중에서는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당시 파죽지세로 승단하고 있는 후지사와구라노스케(藤澤庫一朋齊) 6단이 상대가 되었다. 후지사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괴물' 후지사와슈코의 연상의 조카. 흉내내기의 명수가 되는 후지사와는 일본기원 최초의 9단이 다. 후지사와는 당시 흑번필승의 신화를 창조하는 기대주였는데, 이미 오청원도 두 번을 만나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상대였다.

후지사와는 슨당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8단인 오청원에게 선상선으로 붙고 싶어했지만 결국 규정대로 정선. 후지사와가 도중에 7단으로 승단하더라도 10번기가 끝날 때까지 정선을 유지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당시는 일본의 전황이 불리해 신문의 바둑란도 크게 축소되었다. 여간 인기가 아니고선 신문에 실리기가 힘들었음에도, 두 사람의 대결을 몹시 흥미를 끌었다. 1942년 12월 1국이 시작되었다. 오청원은 약속대로 모두 백을 들고 싸우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말기인지라 불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만만의 준비를 하고서 바둑판의 금만 겨우 보이는 상태에서 대국했다.

1국은 오청원이 흑의 철벽을 허물 수는 없었지만, 2국은 비로소 흑을 돌파하였다. 3국은 흑 승리, 4국은 백 승리. 이런 식으로 승부는 호각이었다. 후지사와는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다. 맘 같아서는 당장 호선으로 두어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할 오청원에게 선상선 다음 치수인 정선으로 두어서 2승2패의 호각이라니. 더욱이 4국의 마치고 후지사와는 7단으로 승단했다.

5국은 오청원의 승리. 6국은 후지사와 승리. 7국은 오청원의 승리. 이제는 오청원이 먼저 이기고 후지사와는 뒤따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작은 문제가 생긴다. 7국이 끝난 뒤 오청원과 후지사와는 둘 다 징집영장을 받고 곧바로 귀향 조치를 받으면서 정상적인 10번기가 될 수가 없었던 지경이 되고 만다. 결국 신변의 불안을 느낀 외국인 오청원은 8국부터 10국까지 3연패를 당하고 치수고치기 10번기는 4승6패로 마감한다. 후지사와를 상대한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예상을 뒤엎은 결과이며 무승부에 가까운 성적을 남긴 것은 오청원으로서는 건투였다.

다음 10번기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 1946년 8월 벌어진다. 하시모토우타로 8단을 내세우기로 한다. 제2기 본인방이 되었고 그해 봄 승단시합에서 전승을 거두는 등 하시모토는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제한시간은 비상시국이니 7시간.

하시모토는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1국 승리 후 내리 4연패를 당하며 역시 오청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6국은 하시모토의 건강을 핑계로 좀 더디게 진행이 되었고, 막판의 고비를 넘긴 하시모토는 결국 7,8국을 패하며 6승2패. 약속대로 치수가 고쳐지고 말았다.

'백1집 내지 2집승'으로 결론난 이와모토와의 10번기.

암울한 시대였으므로 보다 일본 팬들을 자극할 수 있는 라이벌전을 자주 필요했다. 패전국 일본의 오청원의 선전에 열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누군가가 그를 꺾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다음 상대는 이와모토가오루(岩本薰). 이와모토는 해외보급을 위해 사재 10억엔 이상을 쾌척한 인물이다.

특히 1국은 중반 이후 끝까지 패싸움을 하고 있으며 중국을 하고서도 문제가 남겨진 채 당시는 '백1집반 내지 2집승'이라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당시의 기보를 보면 흑을 든 이와모토가 공배까지 다 메운 상황에서 팻감이 많으니 흑A로 패를 해소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해결이 빠른 시간에 되지 못하고 '백1집 내지 2집승'이라고 보도가 났다.

당시 일본기원에는 뚜렷한 바둑 룰에 관한 규약이 없었으므로 실로 난감했다. 어느 편이든 팻감이 많을 경우 마지막 패는 가일수하지 않고 중국 한다는 잠정 규정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나중에 백1집 승으로 정정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는 가일수를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룰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2국은 오청원의 불계승. 3국은 이와모토의 3집반승. 4국은 오청원 승리. 판세는 3승1패가 되었다. 제5국은 오청원의 역전승. 6국은 또 오청원이 이겨 5승1패가 되었다. 이와모토도 선상선으로 치수가 고쳐졌다.

1949년 후지사와호사이(藤澤朋齊 과거명 후지사와구라노스께)가 9단으로 승단하였다. 유일한 9단.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9단이 명인 밖에 없었으니 가히 명인에 필적하는 권위다. 후지사와는 6단 시절 오청원과 10번기를 펼쳤지만 당시엔 정선임으로 진검승부가 아니었다. 요미우리가 첫 9단이 됨 그를 붙잡아서 10번기의 달인 오청원과 맞붙이기로 했다.

그런데 후지사와는 좀처럼 10번기를 승낙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최초의 9단으로서 명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위치인데, 섣불리 10번기를 해서 치수라도 고쳐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설사 패하기라도 한다면 최초의 9단 입장에서는 얼굴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요미우리는 신문 기보도 빨리 작성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후지사와 9단이 고집을 부리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일정상 어쩔 수 없이 대타를 찾게 되었고, 하시모토우타로 본인방과 두 번째 10번기를 먼저 가진다. 1차 10번기는 오청원이 치수를 고쳐놓았기에 선상선. 10번기 결과는 5승3패2무승부라면 오청원이 잘 싸운 전적이다. 애당초 대타로 나선 하시모토로서도 잘 싸운 시리즈였다.
▲ 10번기의 하이라이트였던 오청원-후지사와호사이의 대국.

다시 후지사와 측. 이제 운명의 오청원-후지사와 10번기가 본격적으로 재 논의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차피 맞붙어야 할 운명이었다. 일본 최초의 9단으로 일본기원의 희망인 후지사와와 오청원 간의 10번기는 여론에 밀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제한시간을 몇 시간으로 하느냐로 싸웠다. 장고파인 후지사와는 13시간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고 오청원은 10시간 이틀제를 고집했다. 제한시간은 어느 기사에게나 문제가 된다. 오청원은 1일 마감을 원칙으로 하는 사람이다. 바둑은 어디까지나 경기이기 때문에, 2일 이상 소요되면 동료들의 충고 등 아무래도 불순한 요소가 끼어들 수 있다.

결국 13시간으로 결정 났다. 1951년 10월 후지사와측과 접촉을 시작한지 2년 여만에 2차 10번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 10번기는 소화(昭和)시대 를 통틀어 최대의 바둑으로 꼽힌다.

드디어 공식랭킹 1위와 일본기계의 풍운아이자 비공식랭킹 1위를 달리는 오청원의 대결이 시작된다. 태산 같은 덩치에 헤비급 몸매의 후지사와와 그 앞에 가녀린 플라이급 몸매에 눈빛만 빛나는 오청원. 피차 한발도 물러설 수 없는 전면전끝에 1국은 오청원 승. 2국은 오청원 역전패. 3국은 필사적으로 따라잡아 빅. 4국에서 오청원 패. 이로써 4국까지 1승2패1무로 오청원이 살짝 뒤지는 결과였다.

오청원이 덤이 없는 시합에서 흑을 들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지는 일은 없었다. 더욱이 5국은 오청원이 백 차례. 5국은 중차대한 한판이었다. 3일째 저녁 필사적인 승부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그런데 몰입해있던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불이 들어오자 "앗 차차!"하고 놀라기도 했다. 결국 5국은 악전고투 끝에 2승2패1무로 균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6국이 분수령이다. 서로 4승차가 나야만 치수를 바꿀 수 있다는 약속에 따라 1무승부가 힘을 쓰고 있었다. 즉, 어느 한쪽이 1승을 거두어 3승1무가 되면, 설사 상대는 전판을 모조리 이긴다 하더라도 6승3무1패밖에 안 된다. 6승과 3승은 4승 차이가 아니므로 자존심은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청원의 괴력은 나오고야 말았다. 6국부터 10국까지 내리 5연승을 거둔 것.

▲ 2006년 개봉된 영화 <오청원>의 포스터.


▲ 후지사와후사이-오청원 10번기 대국 장면. 후지사와는 "나는 왜 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도전한 것이다"고 밝혔지만, 또 다시 패하고 말았다.


후지사와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게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후지사와는 제3차 치수고치기를 신청한다.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고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지만, 만약 이긴다면 반 본전은 하는 셈이다. 그리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10번기 사상 처음으로 오청원을 이기는 기사가 될 수도 있다.

3차 10번기에서도 후지사와의 기대는 깨졌다. 선상선으로 출발하였으나 정선치수로 바뀌고 말았다. 오청원은 6국만에 5승1패로 4승차를 만들었다. 치수가 정선으로 바뀌자 더 이상 대국은 두어지지 않았다. 더 두다간 두 점 치수까지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본 바둑계의 충격파는 대단했다. 후지사와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이기지는 못한다고 해도 선상선인 치수가 정선으로 고쳐질 것이란 생각은 못했던 것. 마지막 6국 때는 한판만 지면 치수가 바꿔지는 상황이어서 후지사와 는 일본기원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하여 품속에 사표를 넣고 다녔을 만큼 배수의 진을 쳤다.

오청원의 치수고치기도 바야흐로 하이라이트를 넘어섰다. 후지사와와의 세 차례에 걸친 치수고치기는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인생의 하이라이트였으며, 이로써 난다 긴다 하는 기사들과는 전부 선상선 또는 정선으로 치수를 바꿔 놓고야 말았다. 이후 '면도날' 사카다에이오(坂田榮男) 본인방전 9연패를 달성하는 다카가와가쿠(高川格)와의 10번기마저 치수를 바꿔놓고야 만다.

처절한 승부세계의 진면목을 보여준 치수고치기 10번기-. 앞으로 이것보다 더 쇼킹한 기획이 벌어질 수 있을지 의문인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15년 동안 11번의 대국에서 모조리 승리했다는 것은 오청원의 탁월한 기량 외에 그 무엇이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중국인으로서 일본 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바로 철저한 승부욕으로 나타난 것일 테다.

치수고치기는 당대 톱클래스에 오른 두기사가 맞상대해서 승부를 겨루는 대국이므로 그 한판 한판엔 승부사로서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따라서 70년이 지난 지금도 바둑인들에게 10번기 기보는 필독서가 되고있다.

"그는 동양문화의 정수다. 그의 기풍은 변화무쌍하기 그지없다. 나는 그처럼 순결한 예술가를 본 일이 없다." <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야스나리의 오청원론이다.

위 글을 기자가 '오청원회고록' '월간바둑' '오청원10번기' 등 여러 서적을 통해서 수집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 1994년 '주간한국'에 연재했던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TYGEM / 진재호
속보/棋聖 오청원 타계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 향년 100세로 별세
2014-12-01 오전 10:13:23 입력 / 2014-12-01 오전 10:43:31 수정
▲ 오청원이 향년 100세로 타계했다.


바둑계의 큰 별이 졌다.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이 별세했다.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11월30일 새벽 1시11분(현지시간), 오청원이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향년100세.

☞ 실록 '100세 棋聖' 오청원 기사 바로가기

요미우리신문은 세계바둑계를 위해서 오청원이 혁명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며,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오청원의 가족은 12월3일 영결식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의 둘째 아들 우창수가 영결식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오청원은 1914년 6월12일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바둑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1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고에 문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일본기원은 그에게 3단을 수여했으며 1950년 9단이 됐다. 1979년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그는 일본바둑의 황금시기에 일인자로 군림했다.

'전설의 10번기'에서 당대 최고수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성적으로 승리를 거둔 오청원은 일본에서 '소화기성(昭和棋聖)'으로 불렸다.

요미우리신문은 부고에서 1933년 오청원과 기타니미노루가 함께 변과 귀를 중시하던 포석에서 중앙을 중시하는 신포석으로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1939년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한 10번기 대전에서 오청원은 10명의 일본 정상급 기사를 차례로 물리치며 1959년까지 바둑계의 일인자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