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오락♣

영재입단대회(입단의 역사)

형광등이 2014. 9. 7. 16:43
김성룡칼럼-영재입단이야기(상)
제3회 영재입단대회를 보고
2014-09-07 오후 3:55:52 입력
▲ 제3회 영재입단대회 전경.


한국 최초의 입단대회는 1954년 10월에 열렸다. 성황리에 벌어진 것이 아닌 유일한 입단대회 참가자였던 김태현 선생(작고)이 자동 입단했다. 당시엔 프로의 개념이 희미했던 때여서 바둑을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의 촌극이다.

시대가 변해 70-80년대에는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이 실력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입단대회를 통해 수많은 무용담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바둑 깨나 둔다고 하면 입단대회에서 어디까지 올라가는 지 바둑인의 '신분'을 상징하게 되기에 이르는데, 이를테면 2차 예선까지 진출했다느니 최종본선에서 몇 위를 했다는 등의 무용담이 그것이다. 특히 2명만 뽑는 대회(오랜 기간 동안 입단은 1년에 두 명만 가능했다.)에서 만년3위로 탈락하는 아쉬운 강호들의 이야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술 안주거리로 늘 회자되곤 한다.

1986년 한국기원은 연구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입단대회를 처음 열었다. 기존의 입단대회와 병행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인 입단문호는 완전히 닫아버리고 만18세 이하의 연구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첫 입단자는 김원과 이창호. 이후 이창호의 성장은 80년대 조치훈의 활약과 더불어 어린이 바둑 붐의 기폭제가 되기에 이른다. 3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바둑계의 백년대계는 대성공작이었다.

그러나 초기엔 반발이 많았다. 20-30대의 프로 지망생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고 당시 연구생의 실력이 세다면야 백 번 천 번 인정하겠지만, 아마정상급이 보기엔 10대 어린 기사들의 실력은 변변치 않았다. 심지어는 정선에도 힘들 것이라는 설도 많았다. 연구생의 실력이 안정된 5년 후 입단대회는 일반인과 연구생을 별도로 운영하며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 1988년 프로신예:아마정상 대항전에서, 아마대표로
나선 안관욱(오른쪽 당시 아마6단)이 프로 이창호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사진출처=이창호 홈페이지)

연구생 6기(1991년)로 입단한 필자 역시 다시 재개된 일반인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가 된 김철중 안관욱 사범에 비해 실력이 약했다. 일반인이 입단대회에 나와도 10대 어린 기사를 이기지 못하게 된 건 박영훈이 입단할 즈음인 1999년 전후. 연구생제도가 시행 된지 10년이 넘어서야 ‘왜 나이 어린 약한 애들만 따로 뽑느냐’는 핀잔이 사라졌다.

90년대 세계대회가 연이어 창설되면서 바둑교실 붐 세대들은 경쟁이 치열했다. 그 경쟁만큼이나 입단대회도 어려웠고 지금에 와서는 연구생이 재수생(20대 초, 중반)들에게 밀리는 현상이 일어나며 우리 바둑계는 비상이 걸렸다.

1990-2000년대 초반만 해도 프로가 되려는 전문 수업을 받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중학교 졸업 즈음 다시 학교공부로 유턴한다고 해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었다. 어느 순간 프로가 되기도 어렵지만 좋은 대학 가는 것도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자 이도저도 안 되는 대책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여파는 결국 '이무기'들이 계속 바둑을 포기하지 않게 되면서, 이들과 싸워야 하는 10년 이상 어린 영재가 프로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리기에 이른다. '타도 일본'은 끝냈지만 다시 '타도 중국'을 외쳐야 하는 상황에서, 묘하게도 현재 우리나라 입단대회 분위기는 연구생 입단대회를 처음 시작할 때인 30년 전 1980년대로 회귀했다.

연구생 입단대회가 뿌리를 내리게 된 건 확실한 명분과 이유가 있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린 영재를 키워야 하며 실력이 약해도 어릴 때 프로가 되면 때 묻기 전에 바둑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년간의 연구생제도는 대성공이었다.

연구생의 기준은 만18세. 그것은 일본과 상대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을 상대하려면 만18세로 적당한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올해 중국 입단대회의 주력은 98-99년생으로 만15~16세. 특히 만12세의 2002년생 입단자까지 배출했기 때문에 중국의 어린 기재들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 3년전 신민준-신진서 입단대회 모습.


지난 8월21일 제3회 영재입단대회 첫날이었다. 영재입단대회 첫해엔 신진서, 신민준(랭킹점수 9200-9300점대)이라는 초대형 신인을 배출하며 대회의 위상을 높였다. 기량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불만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고, 실제 이들은 현재까지 누가 봐도 모자라지 않을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살짝 불만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회 대회다. 기존 입단대회 통과자와 비교해 실력의 격차가 좀 벌어졌다는 점이 문제였다. 영재 2기생인 설현준 최영찬의 실력은 여자국가대표 톱클래스(랭킹점수 8700-8900점대)와 비슷한 정도. 실력의 격차가 크면 특별입단이 아닌 특혜입단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더욱이 올해 3회 대회는 실력의 격차가 2회 대회보다도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영재입단대회가 별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입단하는 영재들의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이들을 가르친 도장 사범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여자 입단대회 입단자(랭킹점수 8500-8600점대) 수준이라고 한다. 바둑계 역사상 같은 해 아무리 나이 차가 커도 남자입단자와 여자입단자가 비슷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영재입단대회도 예전 연구생입단대회가 처음 생길 때와 같이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기다려야 하지만, 중국에 밀리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조급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다.

▲ 영재입단대회 모습. 2002년생 송민혁-박종훈(승)


한국기원 4층 예선 대국장은 서울의 각 도장 원장과 사범, 학부형들로 꽉 차 있었다. 국가대표실은 그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영재들의 경우 국가대표팀에서 육성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인재들이기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 프로들도 미래 라이벌이 누가 될 지를 가리는 입단대회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도장원장님에게 16강전 대진표를 보면서 8강 진출자 예상과 입단 가능성을 한번 얘기해 달라고 했다. 국가대표 전력분석관이라고는 해도 중학생 아마바둑계에 관해서는 18급 하수가 아니던가.

원장님의 답변이 기가 막히다. 마치 방송해설을 듣는 것 같이 어디서 배우고 현재 실력은 어떻고 부모님 얘기, 집안 사정 등등 16명 전부를 완전히 꽤 차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16강에서 8강으로 진출한 8명을 전부 맞추고 다시 4강 4명까지도 전부 맞췄다는 점이다.

올해 참가자격은 2000년생 이하. 반대로 말하면 2000년생은 올해가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욱 치열하다. 실제로 시합이 열리는 2층 대국장으로 가보니 2002년생이 한 명 보인다. 이름은 송민혁. 올해 입단하면 신진서 만큼이나 흥행이 될 만한 아이다. 입단할 확률이 10%로는 된다고 해 얼굴을 확실히 알아두었다. 결과는 8강에서 탈락.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괜히 아쉽다.

▲ 윤성식-박진영(승).


8월25일 입단대회 마지막 날이다. 기원 주차장에서 시계를 보니 오전 9시30분. 10시에 벌어지는 입단최종국 분위기를 보기 위해 30분 정도 일찍 한국기원에 도착했다. 거의 같은 시각 빨간색 자동차에서 엄마와 아들이 내렸다.

목례를 하는 아이 이름은 윤성식. 그는 전날 양천 대일 도장 에이스 박진영에게 입단자격을 헌납했다. 다행히 아직 어려서인지 입단에 대한 초조한 기색은 안 보였고 엄마가 사준 음료수 하나를 들고 대국장에 먼저 입장했다. 윤성식의 마지막 상대는 같은 충암도장의 박종훈. 윤성식의 어머니는 4층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결과는 박종훈이 승리하며 2위 입단했다.

아들은 3위로 탈락했다. 같은 도장 아이들끼리의 최종국은 도장입장에서는 비극이다. 당분간 한 아이는 축하받기 바쁘지만 다른 한 아이는 그런 분위기의 도장에 도저히 다닐 수가 없어 급기야 발길을 끊는 아이들도 있다.

입단 대회에서 탈락하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다음 날이면 도장에 나와 공부한 4차원 박창명이나 군대 가기 전날 밤까지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군 입대 했던 김기용의 경우는 정말 특이한 케이스. 대개 방황하고 그렇게 몇 달을 보내면서 귀중한 시간을 다 놓쳐 다음 시합에서는 더 저조한 성적을 보이는 것이 다반사다. 사실 실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시험 결과에 따라 운명이 크게 바뀌는 것은 그 이후의 모습 때문이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