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돌팔이다!-해태 주치의(임채준) 회고록]
김응룡 감독이 삼성으로 간 사연
[OSEN 2008.03.03 14:17:14]

김응룡 감독이 삼성으로 간 사연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 때문이었다. 유명을 달리한
김동엽 해태 초대 감독은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통했다.
하지만 그의 기인적인 행동이 결국 해태라는 기업에는 어울리지 못했고
하지만 그의 기인적인 행동이 결국 해태라는 기업에는 어울리지 못했고
또 지역민의 정서와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인이 된 김동엽 감독도 야구인으로서는 한 시절을 풍미한
조창수 감독 대행으로 마무리 되던 즈음,
누가 과연 해태 감독이어야 하느냐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갔다가
결국 김응룡 감독으로 낙착되었다.
모든 감독이 그렇듯 김 감독도 일단 3년 계약이었다.
모든 감독이 그렇듯 김 감독도 일단 3년 계약이었다.
계약이 끝날 즈음 구단에서는 어떻게든 김 감독을 해태에 잔류시키고 싶어
당시 강남형 사장을 비롯해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를 해
김 감독의 의중을 타진해댔다.
낸들 무슨 수로 김 감독을 해태에 잡아놓을 수 있었겠는가.
낸들 무슨 수로 김 감독을 해태에 잡아놓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어느 날 김 감독이 나에게 자기의 옛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약간의 가능성이 인정되던 시절, 모 야구단에서 김 감독에게
서울에 집도 사주며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는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
그래서 부친에게 그 말씀을 드렸더니 “나와 네가 거처하고 먹을 수 있는
돈벌이는 이 애비가 할 수 있으니 너는 돈 생각 말고 야구나 열심히 해라”
하고 한 마디로 일축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여기다 김 감독이 덧붙이는 이야기 하나 더.
여기다 김 감독이 덧붙이는 이야기 하나 더.
“한일은행에서 20년 넘게 야구를 했다.
그 보람이 내가 미국에 야구 유학을 갈 수 있는 기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몇몇 동료와 함께 유학이 추진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유학을 가려면 야구단에 사표를 내고 가라는 조건 때문에 모두가 포기했지만
나는 한일은행장에게 가서 이야기를 드렸더니
20년간 우리 은행에 몸담았는데 1년 유학이야 못하겠느냐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일은행에서 월급을 받으며 어떻게 보면
보상유학을 다녀왔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기왕 해태 구단에 들어왔으니 자기의 꿈은 할 때까지 하고
김 감독은 ‘기왕 해태 구단에 들어왔으니 자기의 꿈은 할 때까지 하고
어느 날인가는 해태 구단의 일원으로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마지막 남은 인생을 바치고 싶다’는 은근한 표시를 했다.
내심 쾌재를 부르며 강남형 해태 구단 사장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다.
내심 쾌재를 부르며 강남형 해태 구단 사장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다.
그랬더니 ‘해태에서 만일 감독을 그만두면 임원으로서
감독 연봉보다 훨씬 적어진다,
아닌 말로 사무실 하나에 여직원과 승용차가 임원 대접인데
가능하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것도 걱정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것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어느 기회에 넌지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만
그 안에 열심히 돈 벌어야지 그 때 임원이 되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는 명쾌한 답변을 듣고 나는 김 감독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사실 이야기는 이렇지만 가족을 가진 가장으로서 김 감독의 괴로움은
사실 이야기는 이렇지만 가족을 가진 가장으로서 김 감독의 괴로움은
이 세상 누구도 모를 것이다. 단지 나만 어렴풋이 이따금 김 감독이나
혹은 부인인 최 여사에게서 푸념 섞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계약이 끝나고 감독 이동이 있을 때마다 몇몇 구단에서 정말로
계약이 끝나고 감독 이동이 있을 때마다 몇몇 구단에서 정말로
구체적으로, 심지어 어떤 때는 나에게까지 연락이 올 때가 많았다.
하지만 김 감독 역시 어찌 인간으로서 고뇌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만나면 괴롭다는 표현으로 모든 접촉을 끊다보니
결국 스카웃 제의는 김 감독 부인인 최 여사에게,
또는 영양가 없는 나에게까지 접촉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는 확고하니 누구도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세월이 지난 지금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1999년 말 모기업 해태가 부도나고 지원의 한계를
그러나 1999년 말 모기업 해태가 부도나고 지원의 한계를
느끼면서 삼성 구단에서 구체적인 제의가 들어와 해태
구단에서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 감독은 드디어 삼성 행 마음을 굳힌 뒤 나에게 통보하였다.
김 감독은 드디어 삼성 행 마음을 굳힌 뒤 나에게 통보하였다.
스카우트 비도 확실하지 않지만 거액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돈 다 어디다 쓰겠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임 원장 잘 알지 않소, 내 평생 마누라에게 큰 돈 한번 못줘 보았으니
마누라에게 한번 폼 한번 재보고 싶고, 또 약간의 돈은 당신이 알다시피
돈 없이는 어떻게 꿈나무들을 키울 수 있읍디까? 아무리
좋은 재목이라도 먹이고 재워주고 무엇인가 해주면서 같이
야구를 하지고 해야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스카우트 건은 참 싱겁게도 무산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스카우트 건은 참 싱겁게도 무산이 되고 만다.
그날 아침 김 감독이 해태와 이별을 결심하고 자기 집을 출발하면서
부인인 최 여사에게 “내 오늘은 틀림없이 해태에 사임한다고
통보하고 삼성하고 계약해서 돈 줄테니 안심해” 하고 나왔다고 한다.
최 여사는 현관까지 따라 나오면서 “당신 정말 이번에는 잘해야 해”
최 여사는 현관까지 따라 나오면서 “당신 정말 이번에는 잘해야 해”
라고 다짐을 뒀다. 그리고 본사를 들어갔는데,
회장실에 들어가기 전 많은 기자들에게도
“꼭 일 년 만입니다.” 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 때 김 감독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부인 얼굴이었다고 한다.
회장실을 나와 기자들에게 앞서 먼저 집사람에게 전화해
회장실을 나와 기자들에게 앞서 먼저 집사람에게 전화해
아무 말 못하고 “미안하다.” 는 한마디로만 대신했는데,
그만 가슴이 뭉클하여 혼났다고 하는 회고를 나에게 했었다.
낸들 뭐라고 하겠는가. “1년 더 보게 됐네, 주치의 일 년 더하게 되었네.”
낸들 뭐라고 하겠는가. “1년 더 보게 됐네, 주치의 일 년 더하게 되었네.”
하고 웃고 말았지만 이미 당시에도 김 감독의 마음 속은 해태를 떠나
삼성에 둥지를 치겠다는 생각으로 확고하였다.
그래도 만만한 게 친구였나 보다. 어느날 밤 단둘이 술자리에
그래도 만만한 게 친구였나 보다. 어느날 밤 단둘이 술자리에
앉았는데 김 감독은 나에게 화를 내면서
“구단에 갔더니 절대로 임 원장도 내가 삼성가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하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하는 것이다. 눈까지 부릅뜨면서.
“무슨 소리냐,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부인했지만
“무슨 소리냐,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부인했지만
하루저녁 몸살을 앓을 만큼 그 친구는 나에게 푸념을 해댔다.
김 감독은 이듬해인 2000년 시즌 후 결국 삼성으로 말을 갈아탔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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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이듬해인 2000년 시즌 후 결국 삼성으로 말을 갈아탔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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