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단신

한국식 선후배 문화, 실체와 문제점은

형광등이 2012. 6. 8. 14:01

한국식 선후배 문화, 실체와 문제점은

[포토] 대전은 벤치클리어링 전용구장?
지난 6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한화-롯데전 도중 벤치클리어링 상황이 발생했다. 한화 김태균이 롯데 투수 김성배의 공에 맞은 뒤 언성이 오가면서 비롯된 일이다.
대전= 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담배 한대 피우겠습니다."

선수들만의 휴식공간에 함께 섞여있을 때 후배 선수가 고참에게 이처럼 양해를 구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일본프로야구는 다르다. 일본에선 까마득한 후배가 고참 선수 앞에서 스스럼없이 담배를 꺼내 든다. 담배에 대한 사회 인식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선후배 문화의 차이도 이유가 될 것이다.

지난 두차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뉴욕타임스, LA타임스의 야구기자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한국대표팀의 몇몇 선수들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데 사실인가. 한국 고교야구팀은 몇개나 되는가?"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이 같은 고등학교를, 그것도 세명이 함께 뛴 시즌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놀란다. 이같은 질문에는 신기하다는 의미가 늘 포함돼 있었다. 일본과 비교해도, 우리의 선수 자원 시장은 많이 좁다.

▶김태균과 김성배의 선후배 에피소드

지난 6일 대전구장의 한화-롯데전. 7회에 한화 김태균이 롯데 김성배의 몸쪽 공에 맞았다. 평소 온순한 성격인 김태균이 이례적으로 김성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멍한 표정의 김성배도 맞받아쳤다.

알고보니 선후배 관계를 착각한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고졸 출신 김태균은 대졸 출신 김성배가 본인의 두 기수 위라는 걸 잘 모르고 있었다. 후배인 줄 았았던 모양이다. 때문에 '선배를 맞힌 후배'가 최소한 사과의 제스처를 하지 않았다며 즉각 반응한 것이다. 물론 본인이 선배인 걸 알고 있었던 김성배로선 황당할 수밖에.

벤치클리어링으로 이어진 이날 사태는 이튿날 김태균이 김성배에게 사과하면서 일단락됐다. 선후배 관계에 사구 논쟁이 더해지고 게다가 벤치클리어링까지 발생한 사건이라, 해당 상황을 다룬 기사는 이틀간 인터넷에서 엄청난 클릭수를 기록했다. 댓글만 5700여개가 달릴 정도로 화제가 됐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기본적으로 두 선수 모두 화가 난 이유는 '선후배 관계'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후배가 선배를 맞히고 사과를 안 하다니'라는 오해와 '아니, 후배가 맞았다고 선배한테 큰소리를 쳐?' 하는 반응이 결합된 사건이다.

▶한국에 감독 퇴장이 드문 까닭

프로야구 선수들은 대개 초등학교 4,5학년 즈음에 운동에 입문한다. 그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타학교 선수들과도 자주 만나게 된다. 뻔한 숫자의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전국 무대에서 빈번하게 맞붙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타 학교 선수들과도 자연스럽게 선후배 관계가 연장된다. 프로에 와서도 낯설지 않게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이 된다. '본래 알던 형'이니까.

이처럼 좁은 무대에서 야구를 하다보니 선후배 관계는 야구 이전에 지켜야할 가치로 여겨진다. 한국프로야구의 심판원들은 절대 다수가 선수 출신이다. 그들 역시 감독 및 코치진과 선후배로 엮인 경우가 많다. 한국프로야구가 미국에 비하면 감독 퇴장 사례가 극히 드문 것도 이같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심판 입장에선 기수 높은 선배를 퇴장시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다.

선후배 관계에서 오는 '반말 논쟁'도 있다. 감독이 구심에게 항의하러 나갔다가, 엉뚱하게 전혀 다른 문제로 얼굴 붉히며 서로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있다. 나이 많은 감독이 먼저 "야! 이건 아니잖아"라고 했다가 반말에 열받은 후배 심판원이 "뭐? 야라니" 하고 대응하면서 감정이 증폭된다. 거꾸로 선배인 심판원이 후배인 선수에게 "야! 스트라이크 맞으니까 쓸데 없는 소리 말고 타석에 들어와" 했다가 선수가 격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험악한 빈볼 사태가 벌어지면 메이저리그에선 최근 몇달에 걸친 양팀의 '헤드 헌팅' 역사가 거론되지만, 우리 프로야구에선 몇주 전 있었던 후배 선수의 '무례' 혹은 선후배간의 오해가 언급되는 일도 있다.

▶선후배 관계, 긍정적인 면도 있다

미국 기자가 궁금해했던 부분과 연관 있는 얘기다. 이처럼 모세혈관까지 뻗어있는 한국프로야구의 선후배 관계는 때론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WBC와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 끈끈한 힘으로 구현될 수 있다.

일단 공통의 목표를 향해서 뛸 때, 선후배가 도닥거려주고 조언과 진심을 주고받으며 뭉치는 힘은 한국 대표팀이 최고다. 나쁘지 않은 의미의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일본프로야구와는 다른 부분이다. '알고보니 김병현과 이승엽이 과거 고교 시절에 맞대결을 했었다'는 식의 기사가 꽤 자주 나오는 것도 우리 리그의 특징중 하나다.

지도자 혹은 선수와 심판간의 언쟁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 감독, 심판원, 선수들이 선후배 관계를 떠나 서로 존댓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수년전 지금은 은퇴한 모 구단의 선수가 판정시비 상황에서 동기생인 심판원에게 경기장에서 인격모독 발언을 했다. 그후 공교롭게도 그 투수는 몇차례 연속으로 구원 등판에 실패했다. 다른 심판원들이 굉장히 화가 많이 났다는 얘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선수가 너무 심했으니 만에하나 불이익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정서가 있었다. 요즘은 서로가 조심하려는 분위기다.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일만은 고치자

야구장 밖에서 돈독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는 건 우리 정서상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야구장 안에서다.

팀 내부에서도 선후배 관계가 작용할 때가 있다. 포수가 선배인 경우, 마운드 위의 후배 투수는 사인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가로젓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선 선배 포수가 본인이 편한 패턴으로 공배합을 하기도 한다. 1루에 빠른 주자가 있을 경우, 포수는 도루 저지율을 신경쓰게 된다. 변화구가 필요한 타이밍에 바깥쪽 높은 직구를 요구한다. 그 코스로 공을 받으면 2루 송구가 편하다. 이럴 경우 배터리 코치와 투수코치가 경기후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한다.

최근 몇년간 홈 접전때 강력한 보디체크를 했던 선수가 카림 가르시아 외에 누가 있었던가. 홈접전때 주자가 어깨로 밀고 들어가는 건 한미일 프로야구의 공통되면서도 정당한 플레이다. 하지만 실제 이런 보디체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인데, 특히 선배 포수가 홈을 지키고 있을 때 후배 주자가 밀고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거꾸로일 때도 거의 마찬가지다. 뻔한 좁은 무대에서 다치면 서로 손해라는 생각이 우선시된다.

코치들은 훈련 때마다 선수들에게 보디체크를 하라고 시키지만 현실에선 어렵다. 그렇다보니 포수들은 보디체크가 없다는 설정하에 수비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게 오히려 약간의 충돌만으로도 큰 부상으로 연결된다고 말하는 야구인들도 있다.

한국적 정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 특정 사안이 발생했을 때 프로야구계 전체가 뜻을 모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도 결국엔 선후배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대신 야구장 안에서, 경기 상황에서 만큼은 굴레에서 벗어나야 궁극적으로 프로야구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