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도 KO, 져도 KO! 한국이 낳은 세계챔피언 중에 이렇게 화끈한 복서가 또 있을까. 46승에 KO가 39회. 5패에 KO가 4회다. 한국 미들급 챔피언, 동양 미들급 챔피언, 동양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IBF(국제복싱연맹) 슈퍼미들급 챔피언, WBA(세계복싱협회) 슈퍼미들급 챔피언.... 정말로 해볼 건 다 해봤다. 한데 은퇴 후 주위의 끝없는 배신에 만신창이가 되었고, 저승문 두드리다 최근에야 다시 일어섰다. 마침내 그에게 인생 3라운드의 공이 울린 것이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 > |
수십억 거덜-아내 사별…죽을곳 찾아다녀 |
한때 땅-집문서만 28건 투기꾼 몰리기도…사기-배신으로 다 날려 1년 전 재혼하며 안정…청소용역회사 차려 '인생 3라운드' 새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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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북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중학교 진학하려 할 때 새어머니가 오셨다. 큰 혼란이 왔다.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허전했고, 모든 게 서글펐다. 무안북중에 입학했지만,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마음을 잃은 상황에서 책이며 친구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더는 집에도 들어가기 싫었다. 학교랍시고 달포나 다녔을까. 더는 견딜 수 없어 방향을 틀었다. 김 일 도장에 가서 프로레슬링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갑갑한 집만 벗어나도 살 것 같았다. 서울 사는 사촌형 하나 믿고 무작정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버지가 농사를 많이 하셨어요. 유채와 고구마를 50마지기 정도 했죠. 유채씨 다섯 가마니 떤 날 밤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는 리어카에다 두 가마니를 얹었고, 옆 동네 아저씨에게 한 가마니 7000원씩 받고 넘겼다. 시중의 반값이란 걸 알았지만, 미성년자의 밀거래라 도리 없었다. 거금 1만4000원을 받아 쥐고는 친구네 집에 숨어 있다가 새벽녘에 함평 학교역으로 가 서울행 급행열차를 탔다. 1973년 당시 학교역에서 서울역까지 요금이 600원이었으니 1만4000원은 중학교 1학년짜리가 갖기에는 자못 큰돈이었다.
"한 여덟아홉 시간 걸렸을 거예요. 서울에 도착하니 해거름이 다 됐더라고요. 한데 거기서 못 볼 걸 봐 버렸지 뭡니까. 나 참." 역사를 빠져나오니 여기저기 무리 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물이 담긴 큰 대야에 물방개 한 마리가 헤엄쳐 다니고 있었고, 사람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방개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대야 안쪽에 빙 돌아가며 칸막이를 만들어 놓고 물방개가 들어가는 칸에 돈을 건 사람이 이기는 도박이었다. 그놈의 물방개에게 홀려 순식간에 주머니 탈탈 털리고 말았다. 자장면 사 먹고, 또 기차간에서 사이다, 계란 사 먹고 남은 돈이 못해도 1만3000원은 됐을 게다.
"참말로 깝깝합디다. 날은 저물었는데 돈은 없고. 사실 사촌형네 집이 어딘지도 몰랐거든요. 그냥 흑석동에서 철물점 한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서울역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흑석동을 물었더니 일단 한강 다리를 건너야 한다며 방향을 일러 주었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벌써 해는 떨어져 깜깜했다. "세상에 한강 다리가 그렇게 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돈은 다 날렸죠, 배는 고프죠, 많이 걸어 지쳤죠.... 걸어도 걸어도 다리가 끝나지를 않더라고요. 나중에 권투선수가 되어 로드워크할 때 한강 다리를 뛰었는데 그때마다 물방개가 생각납디다. 허허허."
▶흑석동 달동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보다는 좀 나았다. 일단 흑석동으로 좁혀져 있었고, 철물점이라 묻기도 수월했다. 흑석동 달동네를 하염없이 헤맨 끝에 마침내 철물점을 찾아냈고, 그렇게 서울 생활은 시작됐다. 나중에 아들의 마음을 헤아린 아버지가 사촌형에게 정기적으로 쌀을 보내주셨다.
"영등포역으로 쌀 찾으러 다니다가 노량진에서 동아체육관을 발견했습니다. 프로레슬링을 배우려고 했는데 자꾸 그 복싱체육관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배구와 씨름을 했다. 씨름은 곧잘 해 목포로 원정까지 다녔다. 나중엔 육상부에서 포환도 던졌다. 운동에 자신이 있기도 했지만, 자꾸 미룰 일도 아니었다. 사촌형에게 폐 끼친다는 생각이 깊어질 무렵 독립을 결심했다.
아무리 아버지가 양식을 대 주신다 해도 그것만으로 기약도 없이 사촌형에게 눌어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퍼뜩 생각난 게 철물점 건너편 중화요리점이었다. 특별한 기술 없어도 중국집 취업은 됐으니까. 곧장 중국집 주인과 마주앉았다.
체육관에 다닐 요량으로 오후 세 시부터 두 시간을 빼 달라고 했고, 대신 급료는 남들의 3분의 1만 받겠다고 했다. 손해 볼 게 없는 주인은 단박에 오케이 했다.
"월급 1만5000원 받고 배달 일을 했습니다. 틈틈이 주방에 들어가 면 뽑는 기술도 배웠고요. 관비가 5000원이었으니 돈은 남았죠."
무거운 철가방을 들고 달동네를 수도 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하체는 절로 좋아졌다.
잠은 홀에서 의자 붙여 놓고 잤다. 새벽 운동 나가면서 동료 깨울까 봐 방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빈대와 함께한 체육관 생활
신인왕이 되면서 중국집을 그만뒀다. 김현치 관장이 체육관 생활을 권했던 것이다.
김득구 이상봉 등 10여 명은 이미 체육관에 살고 있었다. 김 관장은 선수에 대한 인정을 그런 식으로 했는지도 모른다.
잠은 난방도 안 되는 마룻바닥에서 잤다. 너무 추워 다닥다닥 붙어서 잤다. 새벽 로드워크 때 땀으로 머리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릴 정도였으니 온기 없는 체육관 마룻바닥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먹고 자고'가 걱정 없던 중국집 생각이 절로 났다.
"여름에는 빈대가 또 극성을 부렸죠. 복싱체육관에는 피비린내와 땀내가 진동하잖아요. 만날 쌍코피 터지니까요. 근데 그 녀석들이 유독 저만 물어대는 통에 아주 애를 먹었어요. 제 피부가 약해서 그랬던가 봐요. 그래서 게임 때도 유독 눈두덩이 잘 찢어졌지요."
주머니에 돈들이 없으니 끼니 때우기도 만만찮았다. 다행히 빵집이나 통닭집 같은 먹을 데서 일하는 관원이 많아 수시로 파티를 벌였다. 손님이 먹다 남긴 것들이었지만, 누구 하나 인상 찌푸리지 않았다. 입 댄 곳은 잘라내고, 식은 것은 데워서 먹었다.
그래도 '세계챔피언'이라는 확실한 목표들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한번은 음식이 풍성한 나머지 술이 곁들여졌고, 자리가 길어지면서 불빛 보고 들른 관장에게 들키고 말았다.
"몽둥이로 엉덩이 엄청나게 맞았죠. 시커멓게 줄이 죽죽 서도록 말입니다. 술을 못 마시는 저는 자다가 당했어요. 그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다음날 아침 단체로 목욕탕 가서 서로 엉덩이 보며 실컷 웃었네요. 허허허."
한국챔피언이 되고 나니 관장이 산동네에 부엌 딸린 방을 얻어 줘 자취생활을 했다. 주먹이 세지니 형편도 차츰 나아졌다.
방을 따로 얻으면서 개인 운동을 시작했다.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혼자 많은 연구를 했다.
어차피 더 때리고 덜 맞아야 하는 운동이라 숱한 경우의 수를 가지고 생각을 많이 해야 했다. 그러다가 수건 갖고 할 수 있는 혼자만의 운동을 개발했다.
"저녁 먹고 옥상에 올라가 빨랫줄에 수건을 겁니다. 그리고는 수건을 적이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운동을 하죠. 수건을 밀었다가 오는 걸 보고 허리를 써서 피하며 반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저는 그 운동을 '미친 짓거리'라고 불렀어요."
길을 걸을 때는 보도블록을 이용해 운동했다. 블록을 따라가다가 옆줄로 한 칸 이동하면서 상대 주먹을 피하고 곧바로 주먹 뻗는 동작을 반복했다.
"완전히 미쳤었죠. 똑같이 두 주먹 갖고 싸우는데 더 치고 덜 맞기 위해서는 미쳐야 했어요."
▶인생 3라운드 공 울리다
파이터머니를 받을 때마다 많건 적건 땅을 사고 집을 샀다.
링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조건 아내 명의로 했다. 글러브 벗었을 때는 집과 땅 합쳐 28건이나 됐다. 매값 착실히 간수해 수십억대 부자가 된 것이다. 국세청에서 투기꾼으로 몰기도 했으나, 나중에 오해를 풀었다.
정작 끔찍한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1994년 동아프로모션을 인수하면서 큰 경기를 추진했으나, 함께 일을 도모한 이가 약속을 어기면서 엄청난 손해만 보고 말았다. 분한 마음에 사무실을 엎었다가 옥살이까지 했다.
그건 전주에 불과했다.
주변에 일면식이라도 있는 사람은 너나없이 달려들어 돈 뜯어내려고 눈에 불을 켰다. 빌려 가면 안 갚고, 툭하면 배신하고, 믿을 만하면 갖고 튀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당했다.
순진하게 사람 잘 믿는 성품이라 영수증이니, 공증이니, 각서니, 차용증이니 하는 건 생각도 않고 살았다. 그러는 사이 재산은 거덜나고, 가슴은 불덩이로 가득 찼다.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두려워 모자를 눌러쓰지 않으면 나가지를 못했다. '싹 쓸어버리고 죽자'고 마음먹고 배신자 집 앞에서 한 달을 기다린 적도 있다.
아내마저 눈을 감자 아예 세상을 포기했다. "너무나 멍청했어요. 바보였죠. 그게 억울해서 죽으려 했습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 몸 던질 자리를 찾았다. "한 방에 확 죽어야지 어설프게 뛰었다가 죽지도 못하고 몸만 상하면 곤란하잖아요. 매일 새벽 수락산 꼭대기에 서서 떨어질 자리 봤어요. 술 마실 줄 알았더라면 벌써 뛰었을 겁니다. 불과 2년 전 이야깁니다, 이게."
방황에 마침표를 찍은 건 1년 전 지금의 아내와 재혼하면서다.
절을 찾으며 분노를 삭였고, 한의원에 다니며 침으로 화기도 다스렸다. 아내의 끝없는 조언으로 많은 이를 용서도 했다.
"더는 옛날의 박종팔이 아니라고 우기지만 가슴에 품은 비수는 쉽게 나오지를 않네요. 요즘도 새벽에 잠이 깨 필름 한 번 돌아가면 죽일 놈 여럿 떠오릅니다. 이제 그 마음마저 깨끗이 재워야죠."
박종팔은 요즘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아내 손에 이끌려 시장도 가고, 솥뚜껑 만한 손으로 장바구니도 든다. 세상살이가 떳떳하기에 창피함은 없단다.
지난 5월 ㈜종우MPS라는 청소 용역회사를 차리면서 새 명함을 새겼으니 새 출발도 한 셈이다.
"이제야 사는 맛을 좀 알 것 같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박종팔이 인생 3라운드는 이제 시작이니까요."
글러브 낀 지 두어 달 만에 서울 신인대회 미들급에서 준우승했다. 소질이 남달랐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977년 11월 26일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전 상대는 정용수. 부산에서 열린 4라운드 경기였다. "어찌나 긴장되는지 링이 서울운동장보다 넓어 보입디다. 왜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누가 더 여유 있느냐, 당황하느냐 차이죠. 3라운드에 소싸움 하듯이 들러붙어 정신없이 치다 보니 갑자기 상대가 안 보이더라고요." KO승이었다. 곧바로 연말 MBC 신인왕전에 뛰어들어 미들급 정상에 올랐다. 2연속 KO승. 우수선수상까지 받았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다. 이듬해 3월 강승환과 붙어 생애 유일한 무승부를 기록했고, 6월에 강흥원에게 첫 패배를 당했다. "프로에서 53전 치러 다섯 번 졌는데 실력으로 진 건 강흥원 전이 유일합니다. 나머지 4패는 부주의나 자만심, 방심 때문이었죠. 체중조절 실패 같은." 어영부영 1무와 1패를 안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시마를 1회 KO로 잡고 기분을 추스른 후 12월 17일 최창백을 3회에 눕히고 마침내 한국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1979년 6월 2일까지 5개월 반 동안 4명의 외국선수를 2~3회에 눕혔고, 8월 22일 일본의 나이토를 2회에 침몰시키며 주인이 없던 동양 미들급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3년 5월 29일, 체중조절 실패로 나경민에게 타이틀을 잃을 때까지 15차례 방어전을 모두 KO로 장식했다. 나경민과의 경기를 통해 방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250g 초과로 계체량에 실패했고, 사우나에 들어가 그만큼 땀을 뽑으면서 진을 다 빼고 말았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링 바닥이 물컹거립디다." 결과는 7회 KO패. 9월 4일 나경민과 다시 붙어 빚을 갚았다. 4회 KO승. 다시 찾은 벨트는 반납하고, 두 달 후 동양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더는 의미가 없었다. 동양에서는 상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벨트마저 반납했다. 그리고 1984년 7월 22일 머레이 서덜랜드(영국)를 KO로 잡으며 IBF 슈퍼미들급 왕좌에 등극했다. 3년 동안 타이틀을 지키면서도 가슴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후발 단체 IBF 타이틀에 대한 세인들의 경시 풍조 때문이었다. 진정한 세계챔피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WBA 슈퍼미들급 왕좌가 공석이 되자 미련 없이 벨트를 반납했다. 1987년 12월 6일 헤수스 갈라도(멕시코)를 부산으로 불러들여 2회 27초 만에 TKO로 잡고 꿈에도 그리던 월드챔피언이 됐다. 이듬해 3월 폴리 파시레론(인도네시아)을 눕혀 1차 방어전에도 성공했다. 하필 그 시점에 달갑잖은 천적이 등장했다. 베네수엘라의 오벨메히아스(박종팔은 '깜장 메리야스'라고 불렀다). 6년 전 논타이틀전에서 박종팔에게 KO의 치욕을 안긴 숙적이었다. 그날 승부가 당대 최고의 복서 마빈 헤글러에게 도전할 수 있는 티켓 싸움이었기에 아쉬움은 유독 컸다. 한데 그가 6년 반 만에 2차 방어전 상대로 나타난 것이다. 수안보에서 붙어 12회까지 버텼으나 타이틀을 잃고 말았다. "7라운드에 버팅으로 이가 깨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레프리가 스톱을 안 시켰어요. 게임 끝나고 검사받으니 윗니 3개에 금이 갔더라고요. 결국, 2개는 뺐죠."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해 겨울 후배 백인철과의 라이벌전에서 KO패, 찜찜하게 주먹 세계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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