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02 오후 1:51:59 입력 / 2015-03-02 오후
8:41:51 수정
▲ 형제애 가족애로 바둑판 제작에 반백년을 바친 6형제바둑판의 명인명장들. 왼쪽부터 둘째 신명식, 셋째
병식, 첫째 완식, 넷째 춘식, 다섯째 추식, 여섯째 우식씨.(사진출처=6형제바둑홈페이지).
50년을 이어 온 바둑명가
6형제바둑판 가족경영으로 브랜드가 된 기업은 세계적으로는 많다. 역사가 200년이 넘는 기업만 해도 일본이 3113개, 독일이
1563개, 프랑스가 331개가 있다. 과연 전통이 브랜드로 자리 잡은 선진국답다. 국내에서는 그 보다는 훨씬 못 미치지만 '가스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 등 7개 정도가 100년을 넘겼다고 한다.
바둑계에서 50년 이상 지속된 것이 무에 있을까. 한국바둑의 본산
한국기원이 환갑이 되었고, 그 외 개인이 소장해 온 골동품이 된 바둑판이 가끔은 있겠다. 돌 건축물 등 고형화(固形化)된 것 이외에 반백년이란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으리라.
국내에서는 독보적이며 세계로 눈을 돌려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업적을 쌓아놓은
6형제바둑판이 올해로 50주년을 맞는다. 나무와 함께 생활한 지 50년이니 무려 18250일에 달하는 장구한 세월이다.
6형제바둑이
그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바둑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다. 바둑의 전당이 있다면 단연코 그들을 위한 코너가 배려되어야 정도. 유달리 바둑실력에
비해 바둑문화가 빈약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한국의 저변을 감안하면, 명반(名盤)을 만드는 6형제바둑의 장인정신이 있다는 것은 한국의 유일한
체면치례다.
완식, 명식, 병식, 춘식, 추식, 우식-. 이들 신씨 6형제의 인생은 희로애락의 굴곡을 넘어 바둑판제작에서 입신의
경지에 들어섰다. 묵묵히 화목함을 무기로 반백년을 이어온 명인(名人) 명장(名匠) 6형제바둑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2012년 남양주에서 완공한
신사옥 겸 공장의 위용. 벽면을 자세히보면 바둑돌이 붙어있고 화점도 찍혀있어 바둑판이 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6형제바둑판의
태동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형제가 많다보니 부모님은 공부시킬 엄두는커녕 입에 풀칠하는 것도 벅찼다. 상급학교를 못
가는 것도 슬프지만 이러다간 남의 집 머슴살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가난이 명장(名匠)을 만들었다. 1965년 신완식(65)씨는 14살
때 전남 곡성에서 계란 16꾸러미를 판돈을 쥐고 상경한다.
애초에 바둑과는 인연이 조금 있었다. 고 조남철 선생이 서울에서
'송원'이라는 기원을 운영했는데, 그곳에 의탁하여 허드렛일도 하고 낡은 바둑판을 수리하기도 했다. 조남철 선생과는 삼촌의 동서지간이었으니,
지금은 찾아가서 한 몸 의탁하기엔 남사스러운 사이겠지만, 당시엔 꽤 가까웠던 관계.
송원기원에서 카운터를 보면서 두 세 달이
흘렀을까. 6형제바둑판의 뿌리가 만들어질 전기가 마련된다. 바로 베트남파병 장병들을 위해 바둑판과 장기판 수요가 대량 발생하면서 서울 중구
필동에 임시 바둑판제작소가 생기기에 이른 것. 그로부터 반백년 후 6형제바둑(주) 회장이 되는 신완식은 바둑판과 진한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의
신나는 대패질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흔히 역사에 남을 위인을 바로 볼 때 그 천재성에 관심을 보이지만, 이면에 담겨진 그의 피나는
숙달과 노력은 유심히 살펴보지 않을 때가 많다. 고 우칭위엔(吳淸源)의 굽어진 중지(中指)가 두꺼운 바둑책을 오래토록 들고 익혔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이 굽었던 이가 한국에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대패질의 달인 6형제바둑판의 장자 완식이었다.
공방(工房)이 커지면서 중구
필동에서 서대문으로 옮겨갔고 점차 장인의 풍모를 갖추어갈 때 둘째 셋째가 힘을 보태고, 막내 넷째 다섯째가 시간차를 두고 합류하게 되어 급기야
명반제작의 일가를 이루게 된다. "(신)완식 형님이 대패를 잡기 시작한 지 올해가 딱 50년째며, 명식 형님이 46년째, 제일 마지막으로 합류한
다섯째인 제가 36년째가 되니까 6형제 경력을 모두 합치면 300년이 되어갑니다." (다섯째 총괄본부장
신추식)
▲
6형제들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출처=한경비지니스.
▲ 바둑용품
전시장
바둑판제작의 대부가 되기까지 6형제의 바둑판 제작 역사는
한국 바둑의 눈부신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6형제바둑은 문방구에 바둑판을 낱개로 팔던 조그만 공방이 안정된 기반위에서 명품 명반제작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국내 바둑판 사업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조남철과의 인연, 바둑판수리의 인연에 이어 서울 중구필동 서대문
등지에서 10년 동안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초창기 신완식은 전국 기원의 바둑판수리를 담당했고 수입도 늘어났다. 돈 버는 재미를 당할 것이
있겠는가. 3년 뒤늦게 합류한 둘째 명식과 함께 1975년 서울 금호동 현대극장 옆에 '중앙바둑'이라는 10평 남짓한 공방에서 희망찬란하게도 내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40년 전 금호동시대는 행복했다. 죽어라고 일을 해도 내 일이었기에 밤을 새워도 밥을 굻어도 힘들지
않았다. 당시 배달수단은 자전거였다. 수원 인천 등지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곤 했는데, 꼬박 5~6시간을 짐자전거 몸체보다도 키가 큰 바둑판
꾸러미를 싣고 배달전선에 나섰으니 그 고역을 이루 말해서 무엇 하리.
결국 오토바이를 마련했다. 오토바이도 처음엔 고단했다.
운전이 서툴러 비오는 날이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던 것. 그래서 안전한 1단 기어만으로 배달을 다녔다. 드디어 차량을 구입한 것은 1982년.
차량구입과 함께 전국으로 바둑판을 공급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졌음은 물론이다.
▲
중국 산동성과 한중친선교류전도 남양주 공장에서 유치했다. 사진 위는 화이강 중국 위기협회주석, 신추식 본부장, 서대원 아시아바둑연맹
회장.
비바람을 이겨야만 땅은 콘크리트가 된다 굴곡 없는 인생은
무미건조한 것. 어찌 그 정도의 사고로는 50년 인생에서 굴곡 축에나 들 수 있으랴.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험한 꼴도 있었다.
역시 금호동시절, 거래처 어음이 부도나면서 큰 시련을 맞았다. 대전에서 바둑알만 총판하는
사람에게 알과 바둑판을 교환하면서 동업 아닌 동업을 했다가 수금할 돈을 떼여 난관에 봉착했다. 처가에서 소 세 마리를 팔아 빚을 갚았다. 또
1978년 미국으로 처음 수출할 때도 잊지 못한다. 선박에 실어 보낸 바둑판이 습기 때문에 바둑판의 줄이 모두 지워져버렸던 것.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엔 서울 신내동 배 밭에서 비닐하우스 공장을 짓고 나름대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화재가 발생하면서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번엔 전국의 거래처에서 빨리 재기하라며 미수금 수 천 만 원을 일제히 돌려주어서
위기를 넘긴다. 값싼 오락이 바둑 장기뿐이던 시절이어서 이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 거래처도 낭패를 보게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불이 난 뒤 공장은 공중분해의 위기였다. 둘째 명식이 낙심하여 회사를 떠났고(결국 수개월 후 돌아옴) 지금 6형제바둑의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 잡은 다섯째 추식 본부장이 합류하게 된다. 추식은 그 이전까지 기계제작소의 공장장으로 개발시대엔 꽤 좋은
직장이었다.
반세기의 굴곡은 이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1988년 시작된 남양주 시대에도 난리는 계속되었다. 1998년 여름
광릉내 개천 상류의 골프장 둑이 터지면서 공장을 쓸어버린 것. 목재는 물론이며 공방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떠내려갔다. 이때는 정말 평생 해왔던
일을 접어버리고 싶었다.
"불에도 당했고 물에도 당했으니 이제는 겁날 게 없습니다. 형님 계속 합시다!" 어려움이 있을 때 가족은
더욱 똘똘 뭉쳤다. 누구 한 사람 할 것 없이 서로가 두 팔 걷어붙이며 재건의지를 다졌고, 나의 아픔은 다른 형제 가족과 나누었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 있었다. 50년 인고의 역사를 귀한 나무의 나이테처럼 말없이 간직하고 있다.
▲ 바둑알도
다양화했다. 플라스틱과 폐유리 등을 활용해 재질과 색상을 차별화했다. 바둑알 재료로 인기가 높은 대왕조개를 다량으로 구하기 위해 중국 현지에
생산공장을 차렸을 정도.
▲ 시진핑 중국
주석이 방한했을 때 선보였던 신석(神石)
다양한 장르로
사업다각화 50년 동안 6형제바둑판도 발전을 거듭했다. 첫 수출에서 줄이 모두 지워지는 우를 범한 끝에 결국 지워지지 않고
변형되지도 않는 바둑판을 만들어 신기술특허까지 마쳤다. 덕분에 미주 유럽 등 50개국으로 수출시장도 개척했다. 또 중밀도섬유판(MDF) 재질의
접이식 바둑판을 개발해 대중적 보급에는 늘 신경 쓴다.
역시 매출이 가장 많은 제품은 역시 문방구바둑판이다. 요즘은 휴대용
자석바둑판과 칼라바둑알도 상당히 팔린다고 한다. 이제 마인드스포츠로 불리는 차별화 다향화된 세상에 발맞추어 장기 체스 마작 오목 오델로
윷놀이용품 등 나무로 만든 모든 용품을 제작한다. 최근엔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방한했을 때 소개된 신석(神石)이라는 초고급바둑알에도 관심이 많다고
한다. 아무래도 점차 고급용품을 찾는 추세라고.
▲ 형제애 가족애는
6형제바둑판이 50년을 이어 온 가장 큰 무기다. 직원들의 대국을 지켜보는 신추식본부장. 왼쪽이 조카인 신동진 씨.
가족애 형제애 동료애가 장수비결 6형제는 명함제작비가 적게
든다. 6형제가 명함을 하나로 통일해서 파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 '신O식'의 O란에 펜으로 자신들의 돌림자를 써주면 되니까 명함을 하나만
제작해서 나누어쓴다. 명함을 받는 사람도 이름을 기억하기 쉽고, 6형제가 한맘으로 일한다는 점도 알리는 좋은 마케팅수법이다.
각자의 소질에 따라 원목 구매부터 바둑판 줄 긋기와 대패질, 수출 판매 관리 등의 업무를 나눠 맡고 있다. 이를 테면 첫째 완식은
외향적인 성품으로 전반적인 회사운영을 맡고 있고 다섯째 추식은 회사 관리, 여섯째 우식은 공장장을 맡았다. 50년 살아있는 역사는 끈끈한 형제애
가족애가 바탕이었다.
6형제 이외에도 2세들에게 거는 기대도 크다. 해외시장 개척이나 해외 판매루트를 뚫는 데는 '젊은 피'
조카님들의 몫이다. 그 중 맏형 완식의 아들인 동진씨는 매일 출근하여 인터넷쇼핑몰 홈페이지 구축 등 '요즘 기술'로 50년 사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외 조카들도 외국어에 능통하여 해외시장 개척에 필수의 요원들이다.
▲ 6형제는
'신0식'이라는 형제공동의 명함을 사용한다.
▲ 성황을 이루고
있는 왕십리 6형제바둑문화센터.
▲ 김성래프로가
왕십리에서 회원에게 지도대국을 갖고 있다.
살아온 50년 살아갈
50년 "요즘은 먹을 것, 입을 것은 풍족해졌지만 전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지요. 아무리 부유해진다고 해도 맘의
본질이 풍요롭지 못하면 사람은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묵묵히 제 위치를 지키고 있는 나무를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6형제의 조그만
일이 이 사회에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지나온 반백년도 따지면 과거의 일. 이젠 앞으로 살아갈 50년을 준비하고 있단다. 배고팠던
그들 6형제들의 배를 채워준 것도 바둑이며. 그들이 고생한 기간 동안 한국바둑계도 덩달아 발전을 이룬 것 같아 그들은 매우 기분이 좋다.
그래서일까. 신추식본부장은 바둑으로 이룬 자그마한 성공을 바둑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않고 있다.
6형제바둑은
서울 종로 탑골공원과 왕십리역 그리고 수원시 정자동에서 바둑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과천과 남양주에도 곧 바둑문화센터를 열 예정이다. 아마
본격적으로 가동이 되면 사범을 깨나 수급해야 할 성황이다. 이곳에서 바둑을 강의하고 또 애호가들이 바둑이외에 장기나 체스도 즐길 수 있도록
사랑방을 겸하고 있다. 당연히 사범들이 상주하며 지도대국과 강의도 매 시간대에 이뤄지고 있단다.
"바둑과 50년을 함께 살면서
바둑이 지닌 효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바둑을 전파해야하겠다는 일념에 문화사업을 하는 셈입니다. 요즘처럼 가족이 해체되고 인간의 사랑이
메말라가는 시대에 가족의 따뜻함과 인생의 교훈이 담겨있는 바둑을 많은 이들에게 보급했으면 하는 순수함 맘입니다. 돈을 생각하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겠죠."
▲ 이것이 1억짜리
바둑판이다. "자연을 압축 저장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명품명반일 수밖에 없죠."
1억짜리 바둑판 취재를 마칠 즈음 얘기로만 듣던 1억짜리 바둑판을 구경하게 되었다. 기자는 돈 생각이
나서 신추식 본부장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팔 겁니까?" "팔려고 내 놓은 적은 없습니다." "그럼 거래흥정도 안
되었는데 왜 1억짜리죠?" "상징적인 가격이죠. 1억이라는 것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명반이란 뜻입니다. 사실 1억 이상갈 지도 몰라요.
왜나면 굉장히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에 일단 이만한 좋은 재료자체를 요즘은 구할 수가 없어요. 수백 년 묵은 나무에는 수백 년간의 날씨까지
저장되어 있어요. 자연을 압축 저장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명품명반일 수밖에 없죠."
괜히 돈 욕심에 말을 건네본 기자가 속된 인간으로
보여서 혼났다. 1억 바둑판을 설명하는 과정도 자연의 숭고함이 녹아있듯 사방정목 비자판의 결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말하는 신본부장의 태도는
너무도 숙연했기 때문이다.
수령(樹齡) 500~1000년 된 지름 1.5m 이상의 원목을 그늘에서 10년 정도 자연 건조한 후에,
3년 정도의 제작과정을 거쳐야만 완성이 된단다. 제작공정은 13차례에 걸쳐서 170회의 거칠고 섬세한 손길이 반복된다. 제대로 된 바둑판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 참으로 길다. 6형제들의 은근과 끈기는 마치 기다림의 화신 이창호를 연상케 하며, 바둑의 명인과 바둑판제작의 명인은
그 출발과 끝이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우리나라 전국 바둑판의 절반 이상은 그들 6형제의 손을 거쳤을 것이다. 생업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들은 바둑문화의 일각이다. 오는 5월이면 6형제바둑 탄생 5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 계획이라고 한다.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바둑인들을 초청해 집들이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둑판 제작에 일생을 던진 형제들. 자리 소리를 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한 지 어언 50년이기에 그들은 이미 명인(名人)이요 국수(國手)다.
▲ 신추식 본부장이
귀하게 생각하는 서애 유성룡의 친필사인(추정)이 들어간 거북바둑판. 만일 진품이라면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명반(名盤) 명인(名人) 6형제바둑의 역사 1965년 상경하여 송원기원
카운터입사 1965년 바둑판제작 목공소 입사 1975년 둘째 명식과 6월 중앙바둑 창업 1979년 중앙바둑 청계천8가
이전 1980년 중앙바둑 중화동 태릉경찰서 옆 이전 1984년 묵동 배 밭 단지 이전, 형제바둑으로 상호 변경 1987년 3월
형제바둑 화재로 전소 1988년 형제바둑 남양주 천마산 기슭으로 이전 1998년 태풍과 폭우로 사업체 원자재에서 완제품
유실 2004년 '6형제바둑 주식회사'로 법인 설립 2012년 회사 신사옥 완공 2012년 10월 서울 왕십리 6형제바둑
문화센터 오픈 2013년 3월 6형제바둑 문화센터,수원 정자점 오픈 2013년 5월 6형제바둑 문화센터,서울 종로점
오픈 2014년 6월 공장 두 동 완공 2015년 3월 6형제바둑 문화센터 경기 과천점 오픈 2015년 5월 창사 50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