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 영재입단자와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다. 최영찬(2013년 입단) 박종훈 박진영(2014년 입단) 신민준(2012년 입단) .
상편에서 밝혔듯이 영재입단자가 가려졌다. 필자는 앞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만날지 모를 잠재 후보들과 대화할 기회를 만들기로 했다.
아직 핸드폰도 없는 박진영. 모르는 번호는 아예 씹어 버리는 2G폰 박종훈. 입단의 기쁨을 빨리 끝내고 새롭게 시작할 9월을 준비해주려 지리산
무박종주를 계획했다.
8월 29일 밤 7시 서울지하철 오목교역 7번 출구로 나오자 영재입단대회에서 프로가 된 박진영의 입단 축하연
장소가 보인다. 어릴 적 입신(9단)이 귀하던 시절엔 입신 축하연이라는 것은 있었지만 입단 축하연은 드물었다. 갓 사회에 나온 초년병들에게
가까운 친지들의 식사 정도는 모르지만 대형 홀을 빌려 큰 축하연을 벌이는 것은 확실히 예전보다 프로가 되기 어렵다는 반증. 어느 도장에서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200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서울의 각 도장들은 입단 축하연을 펼친다.
모 예식장 피로연장. 평일
저녁 예식이 없다는 것이 양천대일 바둑도장의 150여명의 제자들과 학부형들이 축하하기엔 최적의 장소. 박진영 프로의 부모님은 경남 김해에서
올라와서 감사인사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쁠까. 그것이 단상에서 이야기하는 부모를 보면서 한 첫 번째 생각이다. 세월은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한다고 하던가. 처음엔 내 동생 같던 아이들이 이제는 내 자식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박진영 입단 축하연을 가게 된 계기는
이 날 밤 새로 입단한 영재들과 영재 선배인 신민준, 최영찬을 포함 5명이 지리산 종주를 떠나기 위해서다. 밤 8시30분 축하연이 막을 내리자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주인공 박진영을 ‘등산인 모드’로 변신시켜 출발했다. 사전 점검에선 등산화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 어머니가 산을 좋아해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춘 건 신민준 하나뿐이었다.
▲ 지리산
삼도봉에서 박종훈 박진영 신민준 최영찬
지리산 종주를 당일치기로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기본 장비
구비는 필수. 미래의 프로기사 산악회를 이끌 최영찬은 등산 장비 구매를 아버지가 필자에게 일임한 상황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신용카드를 신나게
긁었다.
물품 구매 후견인으로 갔다가 거침없는 모습에 욕먹을까 두려워 영찬아 그만 구입하라 했더니 영찬 왈 '사범님! 저 태어나서
이렇게 좋은 거 처음 사 봐요. 이런 기회 아니면 못 사요. 아버지가 이해하실 거예요.'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 최규병 사범이
시니어대회 우승했다지만 응씨배 우승을 한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 히말라야에 갈 장비들로 상금을 확실히 축냈다. 아이들의 대담함에 기가 질려
박종훈은 함께 구입하는 것을 포기하고 어머니에게 알아서 챙겨 보내시라고 했더니 K2 산악인으로 풀 세팅해서 보냈다.
지리산 생
초보 원정대는 차려입은 폼만 따지면 그야말로 광고 속의 조인성 저리가라 할 정도. 사전에 주의를 주기 위해 아이들에게 35km 지리산 종주를
설명해도 체감온도가 아예 없다보니 그게 힘든 건지 아닌지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 무박 종주를 두 번 경험만 믿고 서울서 밤 10시반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지리산 능선 종주 시작점인 성삼재에는 새벽 3시에 도착했다.
지리산 종주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가장 힘든
코스는 경남 산청군에서부터 시작해 전북 남원시 인월면까지의 90.5km 태극종주. 보통 3박4일 정도 걸리는 코스로 등산 고수들만 알고 있어
보통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많이 알려진 두번째 코스는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의 45km 화대종주. 보통 완주에 2박3일을 잡는데 빠른 사람은
무박으로 17시간 정도 걸린다. 참고로 얼마 후배기사인 이희성이 17시간에 주파해 놀란 적이 있다. 3번째가 지금은 대다수가 지리산 종주라고
하는 성삼재부터 중산리까지의 35km 단축코스. 1988년 노고단을 쉽게 오를 수 있는 성삼재(해발1102m)까지 도로가 놓이면서 화엄사보다는
3시간 이상을 단축할 수 있는 성삼재를 들머리로 잡기 시작했다.
날머리 역시 정상인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의 지루한 구간보다
3시간이면 하산할 수 있는 중산리 코스를 선호하게 되면서 성삼재부터 중산리를 요즘은 대부분 종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너무 이른
새벽. 버스에서 내리니 아직 여름인데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춥다. 아이들도 한기에 서둘러 점퍼를 꺼내려 가방 속을 뒤진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어두운 산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서울에 살면서 밤에 별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아이들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인지 일행 중 한 명은
실제로 별을 처음 본다고 말했다.
▲ 성삼재에서
새벽 2시반 출발
완주 목표는 14시간. 보통 새벽부터 시작하는 무박 종주자들의 목표시간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대개
지리산 대피소에서 1박을 하는 것이 정석. 다른 산과 달리 지리산은 대피소와 식수가 많아 등산객뿐만이 아닌 여행자들도 많고 안내 표지판이 많아
길을 읽을 염려가 없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자신의 체력에 맞게 산을 즐길 수 있다.
힘이 남아도는 초반 4시간 정도 편안하게 진행을
하니 여명이 밝아 온다. 대략 오전 7시 전후 삼도봉에 도착했다. 전남북과 경남이 경계한 지점이어서인지, 삼도봉이라고 하는데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아이들도 저게 무슨 바다냐고 물어보지만 그것은 실제바다가 아닌 구름바다. 지난해 홀로 종주할 때엔 반야봉에서 구름바다를 봤는데 이번엔
삼도봉에서 보게 되었다. 주말을 맞아 산객 30명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지리산의 대단함을 함께 느꼈다.
종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시작부터 20km 부근인 세석 대피소에 도달하면서 갈등하게 된다. 1박2일로 하는 사람은 관계없지만 무박 종주자들은 낮 시간이 되어 하늘이
뜨거워지는 이 순간이 졸음과 피로가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이다. 하산 코스를 백무동으로 하면 동서울로 가는 버스가 바로 산 입구에 대기하고 있다는
점이 탈출을 더욱 부추긴다.
하지만 지리산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바로 세석대피소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구간에 있다. 세석평전이라고
하는 지리산의 꽃밭이 이곳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피로가 심하면 암만 좋은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 겨우겨우 천왕봉으로 가는
마지막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한 것은 15시30분. 그 동안 27km를 걸었는데 마지막 1.7km가 지금까지 온 거리보다 더 힘들다. 다시 한
시간을 더 걸어 1915m의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항상 오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막상 정상에 서면 힘들었던 것보다 해냈다는 기쁨이 더
크다.
▲ 천왕봉 가는
길
하산하면서 생각해 보니 4명 중 박진영은 대일도장출신 아니랄까봐 체력이 정말 끝내준다. 대일도장은 권투선수출신
김희용원장님이 운영을 하다 보니 체력을 중시해 평소 11km 단축 마라톤을 한강 시민 공원에서 전원이 매일 달린다고 한다. 이를 빗대
바둑계에서는 대일 선수촌이라고도 부른다.
산행 중간에 '신진서랑 정선 접히고 둬도 진서가 이길 거라던데?' 라고 자극을 하자,
발끈하며 한마디. '제가 이기죠.' 바둑 실력은 모르겠지만 일단 기세 점수는 100점. 2000년 5월생인 박진영은 3월생인 신진서를 제치고
한국기원 최연소 프로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입단 경험으로는 그보다 2년 정도 앞서있는 신진서다.
박종훈의 어머니는 박영훈의 작은 집
고모다. 6촌 형인 박영훈한테 좀 배웠냐고 묻자 '큰아버지(박영훈의 아버지) 가 오라고 할 때만 (대국경험이) 많지는 않아요.'
2000년생이지만 1월생이어서 99년생인 민준 영찬과 친구. 덩치 값 좀 할 줄 알았더니 체력은 별로^^. 중도 포기할 것 같은 상황은 많았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모습을 보니 의지도 있고 친구들에게 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보여준 것에 대단히 만족했다.
산행을
모두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니 밤11시. 모두 다리를 절뚝거린다. 다들 탈진해 인사 조차 제대로 하지못하고 헤어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해
준 아이들이 고맙다. 나이는 어리지만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헤쳐 나가며 한사람의 멋진 사회인이 되었으면 한다.
▲ 지리산
천왕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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