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투수 선동열의 추억들
호랑이해 경인년(庚寅年)이다. 야구판에선 선동열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호랑이띠의 간판이다. 사자 무리를 거느린 호랑이가 마침내 제 세상을 만났으니 올 시즌 큰 기대를 해 봐도 좋을 성싶다.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은 2010년 호랑이해 첫 손님으로 '무등산 호랑이' 선 감독을 만났다. 80년 봉황대기 경기고전 15K-노히트노런, 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MVP, 82년 제27회 세계선수권대회 MVP, 86년 프로야구 리그 MVP 및 투수 3관왕, 89~91년 프로야구 투수 3관왕, 89~90년 프로야구 리그 MVP, 97년 5월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 투수부문 MVP…. 쌓은 기록이 하도 많아 일일이 기록하기도 힘들거니와 너무나 유명한 업적들이라 새삼 나열하는 게 멋쩍다. '국보'라는 칭호가 달리 붙은 게 아니다. 그 과정에는 죽기보다 싫은 좌절도 있었고,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도 있었다. 그의 찬란한 행보가 유독 진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동료들 무시 속에서도 따뜻했던 '절친 3인방' |
일본시절 추억 3선 |
① 고마운 택시기사
95년 나고야에서 한-일 슈퍼게임을 마치고 주니치의 이토 대표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선동열을 점찍은 주니치에선 영입을 위한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통역과 함께 택시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한데 이토 대표로부터 "이 사람이 주니치에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택시기사가 돌연 요금을 안 받겠다는 게 아닌가. "그때 나고야라는 데가 참 푸근하고 고향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적을 결정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입단 후 구단 측에 그 택시기사 얘기를 했고, 수소문 끝에 그 기사를 만나 고마움을 전했다. 그와의 악수 장면은 현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지금도 나고야에 가면 그 기사가 있는 '메이타쿠 택시'만 탄다
② 따뜻한 팀 동료
일본 진출 첫해, 동료 선수들의 무시에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었다. 투수 야마모토와 귀화한 재일교포 나카무라, 대만 용병 다이호와는 참 친하게 지냈다. 나고야에서 가끔 술도 한 잔씩 하고, 원정 가면 식사도 같이하고 그랬다. 특히 다이호는 고기도 구워 주고, 요리도 해 주며 위로했다. 자기도 고생해서 큰 선수가 됐다며. 야마모토와는 각별한 친분 때문인지 좋은 결과를 낳았다. 97년 야마모토가 챙긴 16승 중에 선동열이 올린 세이브가 14개였다.
③ 잗단 야쿠자
97년 나고야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 민우가 큰 사고를 쳤다. 어린 마음에 좋다는 표현으로 같은 반 여자아이를 때렸는데 말썽이 생겼다. 여자아이 아버지가 야쿠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직급이 상당한. 코흘리개들 장난이라고 봐 넘기면 좋으련만 그는 문제로 삼자고 덤볐다.
그렇다고 국보급 투수가 직접 나설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아내와 통역이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하고, 빌고 해서 간신히 무마했다. 그 아들은 지금 차세대 골퍼로 성장하고 있다.
야구선수 형 고2때 세상 떠나자 아버지는 야구에 더 애착 82년 세계선수권 일본과 결승전 완투승 기뻐서 울었다… 좌절→재기 … 21경기만에 20세이브 일본서 신화적 기록 |
▶형이 준 선물, 야구
다섯 살 터울의 형이 야구선수였다. 틈틈이 형과 캐치볼을 즐긴 덕에 꼬맹이 때 이미 동네야구 수준은 됐다. 광주 송정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된 특별활동 시간에도 자연스럽게 야구반에 들어갔다. 이래저래 자꾸 야구와 엮였다.
하루는 감독이 제대로 한번 해 보라고 권했다. 1주일에 한 번 취미 삼아 하는 특별활동이었지만 뭔가 달랐던 모양이다. 형의 멋진 모습을 보며 자랐으니 싫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5학년이 되면서 유니폼을 입었고, 투수를 맡아 경기에도 나가고 그랬다.
한데 6학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터졌다. 고교 2학년이던 형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집안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하나 남은 아들의 운동이 달가울 리 만무했다. 2남 2녀의 막내가 졸지에 외아들이 되자 생각이 바뀐 것이다.
운동하면 빌어먹는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다. 게다가 프로가 태동하기 전이니 잘해야 실업선수 아니면 지도자였다. 부모 입장에서는 외아들을 끝이 빤한 길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말씀을 듣기에는 야구판에 빠진 발이 너무 깊었다. "죽어도 해야겠다고 아득바득 우겼습니다. 정말 하고 싶었어요. 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구에 대한 애착이 참 강했습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손을 드셨죠. 대신 '최고가 돼라'고 하시더라고요."
▶송정리 미니야구장
막상 마음을 돌리자 아버지는 딴 사람이 돼 있었다. 아들 야구에 관한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소매부터 걷어붙였다.
당시 집은 광주 시내에서 12㎞ 정도 떨어진 송정리에 있었다. 집에서는 여관 딸린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대문에서 건물까지 20m 정도 됐다. 시골이었지만 주차공간이 꽤 넓었다. 아버지는 거기에다가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꾸미기 시작했다.
우선 티배팅 시설부터 만들었다. 투수라 해도 학원야구에서는 방망이가 필수이기에.
고철상에 가서 쇠파이프를 끊어 폭 3m, 길이 3m, 높이 3m의 정육면체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다 망을 씌웠다. 그리고 주변에는 라이트 시설을 세웠다. 300촉짜리 백열전구 20개를 적절하게 배치했다. 시골 잔치 때 300촉 전구 두 개면 마당을 충분히 밝히고도 남았으니, 20개면 그 밝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미니야구장이었던 셈이다.
정규훈련은 낮에 학교에서 하고, 개인훈련은 밤에 송정리 미니야구장에서 했다. 마침 야구부 동기 셋이 주변에 살고 있어 늘 함께 훈련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4총사가 6㎞ 로드워크로 몸을 달구고 미니야구장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주변 정리를 하셨다.
손님이 차를 몰고 와도 주차를 못 하게 했고, 심지어 주차돼 있는 차까지 밖으로 빼냈다. 아들 운동하는 데 방해된다고. '땅, 땅' 티배팅 소리와 '퍽, 퍽' 캐치볼 소리에 투숙객이 시끄럽다고 소리지르면 아버지는 "딴 데 가라"고 되레 큰소리치며 아들 기를 살렸다.
"라이트 시설로 전기세가 만만찮게 나왔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이것저것 섬세하게 지원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송정리 미니야구장 출신 4총사는 대학까지 같이 갔다. 그렇다고 학교에서의 훈련을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정규훈련이 끝나면 무조건 남아서 개인훈련을 했다. 섀도 피칭 300개에 팔굽혀펴기 300개.
"학교에서 다 못하면 집에 가서 마저 하고 잤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300개는 채웠습니다."
정규훈련까지 포함하면 피칭만 매일 500개 이상 한 셈이다. 여기에 더해진 게 바로 야간 미니야구장 훈련이다.
▶프로의 쓴맛
정말 수많은 승부를 치렀다.
거기에는 86년 프로야구 첫 우승의 짜릿함도 있고, 99년 주니치의 시즌 마지막 투수로 우승을 장식해 헹가래를 받은 감동도 있다. 그래도 최고는 따로 있다. 82년 세계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 완투승. 기뻐서 울기는 처음이었다. 미국, 대만, 일본전 승, 캐나다전 구원승. 그의 볼에 세기의 강호들이 줄줄이 침몰했다.
예상대로 메이저리그 5개 팀에서 스카우트 교섭이 들어왔다. 고려대 2학년 때였다. 빨리 미국에 가고 싶어 일단 휴학계를 냈다. 한데 학교 측에서 "졸업하고 가라"며 막아섰다.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군 면제는 받았으나, 졸업 후 프로나 아마팀에서 5년을 종사해야 유효했다. 85년 졸업과 함께 프로를 등지고 한국화장품에 입단했다. 한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난데없는 부모님의 하소연이었다.
요지는 이랬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듣고 있다. 밤늦게 못된 전화도 온다. 광주에서 살 수가 없다. 빨리 해태로 와야겠다."
한국화장품을 선택한 게 화근이었다. 결국, 시범경기까지 치러놓고 해태로 방향을 틀었다.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전반기 출전정지의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했다. 프로 데뷔전이 늦어진 이유다.
프로 세계는 생각만큼 녹록지가 않았다. 데뷔전은 삼성과의 대구 원정경기. 김일융과의 맞대결로 더 시선을 끌었다. 7회까지 0�?. 사람들은 과연 선동열이라며 감탄했다. 한데 거기까지였다. 8회 5실점, 2대5 패.
"프로의 벽을 절감했죠. 그런데 두 번째 경기에서도 승리를 못 했습니다. 세 번째 경기에서 겨우 세이브를 기록했고, 네 번째 경기 만에 승리를 따냈습니다. 그것도 구원승으로요. 정말 반성 많이 했습니다. '더욱 노력해야겠다, 전진해야겠다'면서요. 한두 게임 만에 승리를 챙겼더라면 프로를 쉽게 봤을 수도 있었겠죠."
▶일본에서…좌절
96년 일본 주니치에 입단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듯했다. 팬들은 '진작 갔어야 했다', '아직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한다'며 흥분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속절없이 판판이 무너졌다. 국내에서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투구 밸런스가 무너졌고, 자신감마저 잃었다.
"너무 힘든 시기였어요. '오늘 시합 안 나갔으면…'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운동장 가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팀 동료까지 대놓고 무시하며 기를 죽였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았다. 더는 자존심이 남아 있지도 않을 만큼 철저하게 뭉개졌다. 대신 그만큼의 근성이 자랐다. 한 해를 고스란히 망치고 어금니를 새로 물었다.
"이대로는 죽지 않는다. 재기해서 그대로 돌려주겠다. 몸이 허락하는 데까지 훈련하자."
시즌이 끝나고 동료들이 휴가를 떠날 때 조용히 보따리를 챙겼다. 어린 선수들의 오키나와 마무리 훈련에 참가하려고. 거기서 고교시절보다 더 혹독하게 뛰었다. 한데 그나마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나고야로의 철수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투수 출신 이나바 재활코치가 말했다. "선상, 지금 91년, 92년 슈퍼게임 때 폼이 아냐. 내 얘기 좀 들어볼래?"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폼'을 찾기 위해 나고야에 돌아오자마자 이나바 코치와 훈련을 시작했다.
"점점 볼 던지는 게 쉬워지더니 내 볼이 나오더라고요. 11월로 훈련이 끝나는데 12월 5일까지 이나바 코치를 물고 늘어졌어요."
한국에는 1주일만 머물렀고, 나고야에 돌아가자마자 다시 이나바 코치를 운동장으로 불러냈다.
▶일본에서…재기
97년 2월 1일, 오키나와 전훈 시작과 함께 눈에 불을 켰다.
첫날 대번에 150개를 던졌다. 호시노 감독이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발들도 20~30개밖에 안 던지는데, 마무리가 미친 듯이 150개를 꽂았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모양이다.
첫 등판은 시범경기 오릭스전. 5�?으로 앞선 8회 말 마운드에 올라 세 타자 모두 삼진으로 잡았다. 그랬더니 9회에 또 던지라고 했다. 한데 이번엔 아니었다. 안타에 이어 동점 홈런까지 맞고 말았다.
그리고 투아웃, 투-스리 풀카운트에서 주자 2루에 두고 이치로와 맞붙었다. 볼 하나로 천당과 지옥이 갈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하필 한국 최고의 투수와 일본 최고의 타자였다. 시범경기였지만 의미로 따지자면 슈퍼게임은 저리 가라였다. 결과는 '끝내기 안타'. 재기전이 패전이 되고 말았다.
"'올해도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에 절망감이 들더군요. 근데 호시노 감독은 시범경기 내내 세이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를 내보내더라고요. 그 후로 단 한 점도 안 내주고 내리 6세이브를 챙겼죠."
그 흐름은 97시즌 정규리그 개막전 세이브로 이어졌다.
3세이브째를 챙긴 요미우리전에서는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다. 노아웃에 발 빠른 주자를 누상에 두고 다카하시와 마쓰이를 연속 삼진으로 잡은 뒤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젠 통할 수 있다!'
리듬을 타고 21경기 만에 20세이브를 달성했다.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단 기록이었다.
팀의 끝없는 추락에도 총 38세이브를 올렸다.
1위 자리는 우승팀 요코하마의 사사키(44세이브)가 차지했다. 팀 성적이 좋아 등판 기회만 많았어도 그 자리는 선동열의 것이었음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공깃밥 5그릇-찐빵 50개'꿀꺽' |
먹고 또 먹고 … 먹을거리 추억 3선 |
① 고교생 몬도가네 : 광주일고에 진학하자 아버지는 먹을거리에 유독 신경을 썼다. 성장기라 잘 먹어야 한다며 오후 네댓 시가 되면 어김없이 뭔가를 먹였다. 운동하다가 딱 출출할 때다. "한약, 뱀탕, 개소주는 기본이고 차마 말로 못할 것들도 많이 먹었습니다. 아버지 정성이라 마다할 수도 없었지만, 제가 원체 먹기도 잘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보양식을 싸들고 집에서 12㎞나 떨어진 학교까지 오셨다. 승용차도 없던 시절이라 오토바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나마 버스도 30~40분에 한 대씩 다닐 때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길을 마다치 않고 오가며 정성스럽게 아들을 살폈다.
"네댓 시가 되면 담 너머에서 부르십니다. 그럼 운동하다가 슬쩍 가서 먹고 와 다시 뛰었죠. 다른 선수들 보는 앞에서는 차마 먹을 수가 없더라고요."
저녁 훈련이 끝나면 또 다른 보양식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효과는 있었다. 허약했던 몸이 눈에 띄게 살아났고, 덩달아 힘도 붙었다. "중3 때 1m65에 62㎏밖에 안 나갔습니다. 많이 말랐었죠. 근데 고3 때 1m82에 66㎏이 나가더니 대학 가서는 1년에 5~10㎏씩 늘더라고요."
체격의 변화와 함께 볼도 묵직해지고 스피드도 나기 시작했다. 사실 대학 숙소에서는 먹는 게 양에 차지를 않았다. 하지만, 어릴 때 죽자사자 먹어둔 게 뒤늦게 효력을 발휘했다.
② 쇠고기냐, 의리냐 : 고려대에 진학하자 아버지가 학교 근처 안암동 로터리의 한 고깃집과 계약을 했다.
아들이 와서 먹는 대로 체크해 두면 한 달에 한 번 뭉쳐서 계산하기로. 물론 아버지가 말한 고기는 쇠고기였다. 당시는 삼겹살 1인분에 250원 할 때였다. 아무리 고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것 먹겠다고 혼자 가서 불 피울 수는 없는 노릇. 잔꾀를 내어 고기를 돼지로 낮추고, 대신 단짝 셋과 같이 가서 먹었다. 쇠고기 1인분 가격이 삼겹살 4인분과 맞먹었으니 아버지에겐 그게 그거였다. 한창 먹을 나이에 돈 걱정 없이 고깃집에 들락거릴 수 있으니 4총사는 신바람이 났다.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였고, 김치 쫑쫑 썰어 넣어 밥도 볶아 먹었다. 고깃집 장부에는 쇠고기 4인분, 콜라 세 병, 밥 두 공기로 적어두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 정도면 가격이 딱 맞았다. 일주일에 두 번은 그렇게 먹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벌써 4총사의 만행을 알고 계셨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럴 거로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친한 4총사였기에.
"숙소에서 일주일에 월-수-금 사흘은 고기가 나왔지만 작은 접시에 1인분이 고작이었습니다. 더 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여하튼 맘껏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 덕분에 고기는 원 없이 먹고 살았죠."
③ 찐빵 50개, 떡갈비 16개 : 잘도 먹었지만, 많이도 먹었다. 고3 때 학교에서 합숙훈련 하다가 내기가 붙었다. '밥 5그릇에 찐빵 50개 먹기'. 콜라 10병이 걸렸다. 물론 도전자는 선동열이었다. 일단 숙소에서 공깃밥 다섯 그릇 가뿐하게 비우고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했다. 사실 찐빵 50개는 보통 사람 열 명이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는 양이다. 한데 그 엄청난 양을 밥 다섯 그릇 먹은 배에다 넣겠다니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결국, 이겼습니다. 50개 다 먹었어요. 정말 미련한 짓이었죠. 다음날 배탈 나서 고생은 했지만, 콜라 열 병이 어딥니까." 승리욕은 마운드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2 때는 크기로 소문난 광주 송정리 떡갈비를 열여섯 판이나 해치우고 마무리로 비빔밥 한 그릇을 허기진 배 채우듯 깨끗이 비운 적도 있다. 그 떡갈비는 요즘 돈가스 크기였는데 운동선수라고 주인이 인심쓰는 바람에 보통 것 1.5배는 족히 됐다.
"고기 참 좋아했습니다. 늘 5~7인분은 가볍게 먹고 시작했죠. 지금은 건강 챙기느라 거의 입에 안 대지만요."